홍인혜ㅣ시인
얼마 전 친구가 대대적인 옷장 정리를 했다. 그는 처분할 옷을 추려놓았는데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가져가라고 나를 집으로 불렀다. 친구가 버릴 옷으로 분류해둔 꾸러미를 살피며 나는 다소 놀랐다. 충분히 입을 수 있는 옷, 값비싸 보이는 옷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차마 얻어가기 미안할 정도라 나는 “이건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 아냐?”, “이건 너랑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하며 패자부활전을 제안했지만 친구는 단호했다. “아냐, 영 손이 안 가”, “매치할 옷이 없어”라며 고개를 저었다.
셔츠 몇점과 모자 몇개를 얻어 집으로 돌아왔다. 빼곡한 옷장에 겨우 자리를 내어 그것들을 찔러 넣으며 나는 친구의 단호함을 곱씹었다. 집착이라곤 없는 그 표표한 태도가 퍽 인상적이었다. 왜냐면 나는 물건을, 특히 옷을 잘 버리지 못하는 성미이기 때문이다. 둘러보니 내 옷장에는 평생 다시는 입을 리 없는 옷들이 절반쯤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물건에 손을 대면 그에 얽힌 기억을 투시할 수 있는 초능력을 ‘사이코메트리’라고 한다는데 어떤 물건에 있어서는 나도 ‘사이코메트리스트’가 되곤 한다. 손끝을 대는 순간 그에 깃든 정서나 추억이 삽시간에 낡은 앨범처럼 촤라락 넘어가서 도무지 절연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옷장은 차라리 일기장에 가깝다. 거기엔 목이 늘어난 여름이 걸려 있고 보풀이 난 겨울이 걸려 있다. 손을 뻗어 페이지를 넘기면 작년의 여행과 남동생의 결혼식, 먼 옛날의 운동회가 펼쳐진다. 그것들은 이미 사물의 경지를 벗어나 있다.
하지만 친구의 초연한 태도는 나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오늘을 살며 우리는 거주비로 엄청난 돈을 지출하고 있다. 부동산이야말로 소유물 중 가장 값진 자산이라는 점을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소용이 되지 않는 물건을 집에 쌓아두고 내 거주환경을 망치는 것은 낭비 중의 낭비였다. 추억은 소중한 것이 맞지만 과거의 망집에 현실이 협소해지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제는 나도 해묵은 집착을 청산할 때가 아닐까.
그래서 나는 집에 특별한 공간을 만들었다. 현관 옆에 나무 상자를 놓고 그 위에 버릴 물건을 올려두기 시작했다. 일부러 잘 보이도록 진열해 두기도 했다. 그리고 그곳을 ‘유예 공간’으로 명명했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진작 버리고도 남았을 옷을 찾아도 바로 결별하기는 너무 애틋한 나머지 정을 떼는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실은 옷가지를 창고나 옷장 구석에 처박아두면 처분을 자꾸 미루고 작별을 회피하게 되므로 수시로 직시하게 만들려는 목적도 있었다.
한동안 집을 드나들며 유예 공간에 놓인 낡은 옷가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작별을 고했다. 차곡차곡 헤어질 마음을 완성한 것이다. 물건에 따라 그 자리에 일주일 정도만 있기도 하고 한달을 머물기도 했다. 오가며 바라보고 또 바라보다 보면 ‘이제 진짜 헤어질 준비가 되었다’는 순간이 오면, 바로 옷을 끌어안고 나가 의류수거함에 집어넣었다. 그토록 절절한 작별임에도 그렇게 헤어지고 그 옷이 다시 떠오르거나 사무치게 그립거나 했던 적은 한번도 없다.
그렇게 몇주간 옷을 정리했더니 다섯칸짜리 서랍장 하나가 비워졌다. 그것은 얇은 판자로 이루어진 싸구려 가구였는데 세월의 지루함에 몸을 뒤틀어댄 나머지 서랍의 아귀조차 잘 맞지 않는 녀석이었다. 나는 그마저 처분했다. 끙끙대며 일층으로 끌고 내려가 건물 입구에 세워두고 대형 폐기물 신고를 했다. 집엔 서랍장의 규모만큼 공백이 생겼다. 오랜 집착과 미련이 거대한 몸집을 이끌고 사라진 자리를 선득한 공기가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