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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파울라인 위에서 서성일 때 / 이명석

등록 2021-04-23 13:33수정 2021-04-24 19:19

이명석 ㅣ 문화비평가

세상이 흐리멍덩할 때 나는 하얀 선을 떠올린다. 고등학교 시절 일요일 아침에 학교 테니스장 문을 여는 일을 맡았다. 파란 라인기에 석회 가루를 담아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선명한 선을 그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친구와 그 위에서 공을 주고받은 뒤 상쾌한 마음으로 공부를 하러 갔다. 저녁이 되어 정리를 하려고 돌아오면, 선은 발에 밟히고 공에 얻어맞아 희뿌옇게 뭉개져 있었다. “한 게임 치고 갈래?” 친구가 물었다. “그냥 가자.” 인과 아웃을 구분할 수 없는 세계에서 툭탁거리기 싫었다.

공교롭게도 나는 그때, 세상의 모든 선을 의심하는, 인생의 어떤 시기에 있었다. 선생님들은 나의 성적을 보고 어느 대학 어느 과에 갈 거라고 확정하고 있었지만, 나는 대학에 가야 하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느 일요일에 테니스장 대신 부모님을 찾아가 고등학교를 그만 다니겠다고 했다. 평생 주어진 선 밖으로 나가보지 않은 분들이 망연자실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내가 원하는 과를 가는 것으로 타협했다.

어른이 되어 보니 세상은 온갖 선들이 뒤엉킨 곳이었다. 게다가 나로서는 저걸 왜 지켜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선배라는 사람은 왜 다짜고짜 반말을 하고 충고를 하지? 얼굴도 모르는 직장 동료의 결혼식 축의금을 왜 내 월급봉투에서 빼가지? 남자가 머리를 길렀다는 이유만으로 전철에서 만난 할아버지가 욕을 하는 이유는 뭐지? 이 정도 태도만으로도 사회생활을 하기가 힘든데, 나에겐 더 큰 문제점이 있었다. 나는 내게 선을 넘지 말라고 하는 사람 앞에서, 그 선을 꼭 밟은 채로 진지하게 따져 묻곤 했다. “저기 어르신, 그냥 가지 마시고 저한테 좀 가르쳐주세요.”

나는 선을 마구 넘어다니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게 아니다.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선을 찾고, 그것을 내 동료, 이웃들과 공유하고 싶다. 골목길의 오징어 놀이부터 농구, 배구, 테니스 등 여러 스포츠를 즐기면서 나는 깨달았다. 선이 없는 게 자유가 아니다. 합리적인 선이 또렷하게 그어져 있을 때, 우리는 더 편안하고 즐겁게 놀 수 있다.

최근 나는 우리 공동체가 단합된 마음으로 지지하는 어떤 선을 발견했다. 주차장의 하얀 선을 밟은 자동차 사진 몇장에 격렬하게 분노하는 사람들을 보았고, 나 역시 그들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을 더욱 화나게 한 것은 그게 단순한 실수나 우발적인 행동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위반자들은 항의할 사람들을 향해 협박 문구까지 써놓았다. 저런 확신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아마도 법적으로 문제 삼기 힘들고, 그런 다툼을 겪더라도 자신이 얻는 이익이 크다고 여기는 것 같다.

이와 유사한 모습은 도처에서 보인다. 미국 대선에서 분명히 패배했음에도 어떻게든 법의 맹점을 찾아내 버티려던 트럼프에서부터 법과 도덕의 경계를 침범하는 파격으로 조회수 장사를 하는 유튜버까지. 선을 넘는 걸로 주목을 끌고 돈을 버는 사업이 횡행하고, 익명의 가면을 쓰고 우르르 몰려가 선을 지우고 누군가를 괴롭히는 놀이까지 성행하고 있다. 대부분 그 선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다.

경기장에서 공이 오고 가다 휘슬이 울린다. 심판의 판정에 불만을 가진 팀이 항의한다. 그리하여 비디오 판독으로 인과 아웃을 가릴 수 있는 세계는 행복하다. 경기장 밖의 삶은 그러기 어렵다. 그럴수록 고민해야 한다. 한 사회가 추구해야 할 공동의 가치는 무엇이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그어야 할 합리적 파울라인은 무엇일까? 오늘 밤 지친 몸으로 주차장에 차를 세울 때, 선에 살짝 물린 바퀴가 마음에 안 들어 핸들을 돌리는 이는 기본은 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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