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노원구 아파트에서 ‘세 모녀’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김태현이 9일 오전 검찰로 송치되기 위해 서울 도봉경찰서에서 나와 무릎을 꿇고 사죄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봉현 | 저널리즘책무실장(언론학 박사)
범죄 피의자의 신상을 어디까지 보도해야 할까? <한겨레>는 경찰이 신상정보를 공개한 ‘노원구 세 모녀 살해사건’ 피의자 김태현의 이름과 나이는 기사에 쓴다. 하지만 얼굴이 드러나는 정면 사진은 쓰지 않고 있다. 지난해 붙잡힌 ‘엔(n)번방’ 사건의 주범 조주빈의 얼굴도 모자이크 처리해 내보냈다. 2019년 일어난 ‘제주 전남편 살해사건’의 범인은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됐지만, 최근까지 사진은 물론 실명도 노출하지 않았다. 다른 언론이 떠들썩하게 보도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한겨레의 원칙은 피의자의 신상을 공개하지 않는 것이다. 한겨레의 ‘범죄수사 및 재판 취재·보도 세칙’은 “수사 대상자의 실명과 얼굴 사진 등은 당사자 의사에 반해 보도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수사기관이 심의위원회를 열어 공개를 결정해도, 한겨레가 자동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수사가 마무리돼 재판에 넘겨진 경우에도 이 원칙은 똑같이 적용된다.
이는 인권보호가 올바른 보도의 대전제이기 때문이다. 확정 판결 나기까지 무죄로 추정하는 원칙은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이다. 법원도 범죄사실 자체가 아닌 범죄자에 대한 정보는 공익성이 없다고 보고, 법률로 정한 일부 사례에 한해 공개를 용인한다. 수사기관이 공개한 정보마저 한겨레가 조심스러운 것은 선정적 보도를 경계해서다. 피의자가 누구인지를 먼저, 자세히 알리려는 욕심이 누군가에게 돌이키기 힘든 피해를 줄 수 있다. 2012년 9월 <조선일보>가 나주 어린이 성폭행범의 얼굴이라며 무고한 시민의 사진을 1면에 공개해 대형 오보를 낸 것이 그 예다. 범죄자에게 잘못된 서사를 부여하거나, 변명의 멍석을 깔아주는 등 과열된 보도의 역효과가 적지 않다.
하지만 원칙과 현실 사이의 긴장이 한겨레를 괴롭힌다. “피의자의 인권만 중요하고 잔혹한 범죄를 당한 피해자나 분노하는 시민은 보이지 않느냐”고 일부 독자는 항의한다. 다 아는 이름을 계속 ‘ㄱ아무개씨’라고 하는 건 너무 형식에 치우친 것 같다는 말들이 내부에서도 나온다. 물론 한겨레도 알 권리와 인권이 균형을 이룬 보도를 위해 피의자 신상을 밝힐 수 있는 기준을 두고 있다. △정치인 및 고위 공직자 등 공적 인물 △범인의 체포나 추가 피해 예방 등 수사상 필요한 경우 △여러 언론이 실명을 공개해 익명을 유지할 실효성이 없을 때 등이다. 보통 편집국장이 편집회의에 부쳐서 공개 여부와 범위를 결정하는데, 찬반양론이 맞설 때가 많다. 사건의 내용이나 그때그때 시민의 정서를 고려하다 보니 대응이 사안마다 다르다는 지적도 있다. 신상공개 결정을 내리는 사법기관의 잣대부터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으니 한겨레만의 어려움은 아닌 듯하다.
지난 12일 독자와 전문가로 구성된 한겨레 열린편집위원회에서도 이런 고민을 토의했다. 황세원 위원(일인연구소 대표)은 “여과 없는 전달은 문제가 있다. 독자들은 한겨레에 지(知)적인 대응을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민정 열린편집위원장(한국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은 “‘수사 주체가 실명을 공개할 경우 실명으로 보도하겠다’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며 “한겨레에서 굳이 (피의자) 사진까지 볼 필요는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일부 위원은 결정을 내리기까지의 고민과 내용을 잘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밝혔다. 임자운 위원(법률사무소 지담 변호사)은 “‘저희는 고민 끝에 다음 몇 가지 원칙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하는 메시지를 지면이나 온라인에서 보여주면 좋을 것”이라며 “한겨레가 어떤 고민을 했는지를 알면서 기사를 보면 독자로서도 ‘이게 중요하지’ 하는 게 더 느껴질 것 같다”고 말했다. 한겨레는 지난해 3월 조주빈의 실명 보도를 결정하고, 그 이유를 별도의 기사로 밝힌 적이 있다.
피의자 신상에 대한 한겨레의 보도 태도는 앞장서지도, 흥분하지도 않는 ‘최소주의’에 가까웠다. 앞으로도 비슷한 사례는 계속 나올 텐데, 신중히 다루고 독자에게 고민의 과정을 설명하는 외에 일도양단의 해답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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