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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서울 말고] 사람과 지구를 위한 속도 / 명인

등록 2021-04-19 04:59수정 2021-04-19 09:26

명인(命人)
인권교육연구소 ‘너머’ 대표

얼마 전부터 읍내(전남 고흥)에서는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대체로 어딜 가든 차를 타고 다녔단 얘기다. 그리고 따로 시간을 내서 운동하러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그런 내가 우습게 느껴졌다. 걸을 수 있는 거리를 차 타고 다니면서 걷기 위해 운동할 시간은 따로 내느라 시간이 없다고 쩔쩔매는 게 말이다. 우리 집은 중심가에서 2㎞ 남짓 떨어진 외곽에 있어, 걸어서 장을 보고 돌아오려면 약 5㎞쯤 걷게 된다.

걸어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했던가? 과연 그랬다. ‘고흥에 이런 가게가 있었나? 이 집 앞엔 이런 나무가 있었던가? 여기 이런 벤치를 만들어놓았네. 아파트 공사가 끝나가니 입주도 끝나면 읍내 풍경이 많이 바뀌겠구나. 아, 고흥 읍내에 미용실이 이렇게 많다니. 정말 한 집 건너 한 집이 미용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세. 하루가 멀다 하고 간판이 바뀌는 가게들이 생기고 있구나. 꽈배기 가게는 뭔 일이 있나? 며칠째 문을 안 여네….’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나무에 연둣빛이 점점 짙어지는 것도, 바람이 차가워지는 시간도, 걸으니까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걷다 보니 불편한 것도 참 많았다. 우선, 보도의 노면이 고르지 않아 자꾸 발을 삐끗했다. 그리고 좁은 보도의 반을 자동차들이 차지하고 있는 곳이 많았다. 아예 자동차가 보도를 점령해버려서 외려 사람이 차도로 내려와서 걸어야 하는 곳도 있었다. 더 어이가 없는 건, 공영 주차장은 텅텅 비어 있는데 갓길도 없는 도로는 주차된 차들로 가득 찼다는 사실이다.

투덜대다가 나는 한참을 멈춰 서서 헛웃음을 웃었다. 언제부터 걸어 다녔다고 어이가 없다네. 바로 얼마 전까지 내가 그랬으면서. 공영 주차장에서 불과 얼마 안 떨어진 목적지까지 걷기 싫어서, 목적지 바로 코앞에 주차하려 기를 쓰던 게 누군데. 주차하기 불편하다고 재래시장이 아니라 마트로 장을 보러 다니던 건 내가 아닌가?

그제야 걷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보이기 시작했다. 나처럼 운동 삼아 걷는 사람이 아니라 늘 걸어 다니는 사람들. 어린이와 청소년, 그리고 노인들은 대개 걸어 다닐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불편한 거리를 걷고 있었겠구나. 자전거는 목숨을 내놓고 타야 하고, 유모차를 밀어야 하는 사람이나 휠체어를 탄 사람은 거리로 나올 엄두조차 낼 수 없겠네. 말로는 사회적 약자가 어떻고, 인권이 어떻고를 떠들고 사는 나조차 자동차 중심의 세상을 살고 있는 핑계는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짐이 많아 차를 타고 나간 날이었는데, 갑자기 도로에 제한속도를 알리는 표지판들이 많아졌다. 제한속도 시속 30㎞. ‘안전속도 5030’을 시행한다더니 고흥도 그런 모양이구나. 그런데 좀 황당했다. 어차피 도로가 좁고 차가 많아 빠르게 달리기 어려운 읍내 중심 도로는 그렇다 치고, 오히려 도로가 넓어지고 차량 이동이 훨씬 적은 외곽 도로까지 시속 30㎞? 운전하면서 열심히 군의 행정을 탓하다가 나는 다시 헛웃음을 웃는다. 내가 정말 당혹스러웠던 건 군의 행정이 아니라 사실, 그 속도였던 것이다. 군 단위에서는 어쩌다 보호구역을 지날 때를 제외하면 시속 30㎞로 운전하고 다녀본 적이 없어서 이 속도면 걷는 게 낫겠네 싶었던 것이다. 그동안 걸어 다니면서 반성했다면서? 거리는 자동차가 아니라 사람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면서?

나는 그 속도에 잘 적응해보기로 했다. ‘안전속도 5030’이 단지 교통사고를 막기 위한 정책만이 아니라 보행자와 자전거가 중심이 되는 도시 교통의 시작이길 바라면서. 이제 우리가 사람을 위한 속도만이 아니라 지구를 위한 속도에 적응하길 바라면서. 그래서 마침내 우리의 삶도 느려지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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