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정책이 국익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한 상식은 실종되고 프레이밍의 정치만 난무하는 것 같다. 참으로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양자택일의 섣부른 행보가 우리의 핵심 국익을 망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왜 극단적 선택만을 주문하는가.
문정인 | 세종연구소 이사장
사물과 현상을 보는 데는 관찰자의 주관이 크게 작용한다. 이는 숙명이다. 다만 현안에 대한 정책적 해법을 찾는 데에는 객관적 사실과 그 시대의 상식이 뒷받침돼야 한다. 최근 문재인 정부의 외교정책에 대한 비판 중에는 이러한 객관적 사실과 상식마저 놓친 채 주관과 편견으로만 만들어진 것들이 적지 않아 보인다. 인구에 회자하는 세 가지 쟁점을 예로 들어보자.
첫번째는 쿼드(Quad) 논쟁이다. 보수 논객과 언론은 왜 문재인 정부가 미국이 요청하는 쿼드에 가입하지 않느냐고 성화다. 미국으로부터 공식 또는 비공식적으로 참여 요청을 받은 바 없다는 정부의 설명에도, 당장 쿼드 참여를 선언하지 않으면 한-미 동맹이 끝장나는 것처럼 말한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도 언급했지만 쿼드는 미국·일본·인도·오스트레일리아(호주) 사이에 여러 현안을 다루기 위한 비공식 협의체다. 지난번 쿼드 정상회담에서 채택한 성명을 보더라도 코로나 백신 협력, 기후변화 워킹그룹, 신흥 및 첨단기술 협력 등 비군사 부분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이를 명시적으로 대중 견제를 위해 만들어진 군사연합으로 보기는 어렵다. 한국 정부도 비군사 분야에서의 협력 의사는 이미 밝힌 바 있다.
이 문제를 왜곡, 과장하는 데는 외국 매체들도 한몫하고 있다. 4월11일치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미 설리번, 서훈 실장에게 쿼드 참여 강하게 압박”이라는 소설 같은 오보를 냈다. 아직 실체도 분명하지 않은 쿼드를 ‘아시아판 나토’로 규정하고 한국에 불참 압박을 가하는 중국 일부 언론의 행태도 부적절하다. 한마디로 가짜 뉴스에 근거한 전형적인 프레이밍 보도다. 한국의 매체와 여론 주도층이 이에 휘둘리고 있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두번째 쟁점은 최근 서훈 청와대 안보실장과 정의용 외교부 장관의 행보를 둘러싼 보도와 논평이다. 4월 초 서 실장은 미국에서 한·미·일 안보실장 회의에 참석했고 비슷한 시기에 정 장관은 샤먼에서 왕이 중국 외교부장을 만났다. 일부 언론은 한국 정부가 위험한 ‘양다리 외교’ ‘줄타기 외교’를 하고 있다고 우려하고, 또 다른 언론은 중국이 한국을 미국 동맹체제의 약한 고리로 간주하고 공략하고 있으며 정부가 이를 덥석 받아들이는 바람에 이제 벗어나기 어려운 수렁에 빠졌다고 탄식한다. 한국이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의 전략적 모호성을 견지하다 끝내 미국으로부터 버림받고 안보의 파탄을 맞을 것이라는 예언은 늘 빠지지 않는다.
어느 것도 동의하기 어렵다. 한국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 목표는 전쟁을 예방하고 한반도 비핵화의 실현을 통해 평화를 공고히 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미국과의 동맹을 굳건히 하면서 중국과의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서 실장이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정책 검토에 우리 측 견해를 반영하기 위해 애쓰는 것과 정 장관이 중국과 한반도 비핵화 방안을 논의하는 것 사이에 모순이 있을 수 없다. 북-미 대화의 재개와 한-미 정상회담 일정 조율, 북한의 태도 변화를 위한 중국 측 협조를 요청하는 일이 모두 현시점에서 필수적인 외교 사안이다. 국익과 원칙에 기초해 투명한 강대국 외교를 전개하고 있다고 칭찬을 못 할망정 이를 망국 외교로 깎아내리는 태도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한·미·일 3국 공조와 관련한 비판을 들 수 있다. 현 정부의 반일 태도 때문에 한·미·일 3국 공조가 어려워졌고, 이는 북한의 군사위협 대응에 허점을 야기했으며, 한-미 동맹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번 아나폴리스 한·미·일 안보실장 회의를 계기로 김대중 정부 시기인 1999년 대북 정책의 효과적인 수립과 공조를 위해 세 나라 사이에 만들어진 대북정책조정감독그룹(TCOG·티콕)을 부활시키자는 이야기도 나온다.
한·미·일 3국 공조는 중요하다. 북핵 문제를 떠나서도 그렇다. 그러나 공조를 위해서는 서로 간의 공감대가 필요하다. 1998년 8월 북한의 대포동 시험발사가 티콕을 가능하게 했지만, 페리 프로세스가 진행되면서 3국 공조는 더욱 긴밀해졌다. 북한에 대한 군사적 억제 못지않게 제재 완화와 인도적 지원을 통한 협상에 역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역사 문제가 아니었다 해도 한국과 일본이 지금처럼 북핵 문제에 대한 접근법이 첨예하게 다른 경우 3자 협의가 기대한 효과를 내기는 쉽지 않다.
외교정책이 국익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세 가지 사례를 보면 그러한 상식은 실종되고 프레이밍의 정치만 난무하는 것 같다. 참으로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양자택일의 섣부른 행보가 우리의 핵심 국익을 망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왜 극단적 선택만을 주문하는가.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