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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부동산 ‘평행이론’의 씁쓸함 / 김수헌

등록 2021-04-12 04:59수정 2021-04-12 14:37

김수헌 | 경제팀장

‘치솟은 집값…‘내집 꿈’은 분노로’.

‘부동산 민심’이 폭발한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 결과를 분석하는 기사 제목으로 어울릴 법한 표현이다. 그런데 이 문구는 뜻밖에도 32년 전인 1989년 5월16일치 <한겨레> 기사 제목이다. 창간 1주년 기념호로 발행된 이날 신문 31면에 실린 한 면짜리 기획의 머리기사다. 이 기사는 집값 급등으로 희비가 엇갈린 30대 서울시민 박씨와 김씨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박씨는 87년 8월 은평구 불광동의 28평 미분양 아파트를 3200만원에 계약했다. 이듬해 입주 시점에 분양가와 맞먹는 3000만원에 전세를 준 박씨는 열달 뒤 자신의 전세금과 저축한 돈, 빌린 돈까지 끌어모아 세입자를 내보내고 새집에 둥지를 텄다. 그즈음 아파트 시세는 8000만원이 됐다. “그때 집을 마련하지 않았으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며 아찔해한다.” 기사가 전한 박씨의 소회다.

반면 김씨는 서울 출퇴근이 힘들어 87년 9월 인천 아파트를 1300만원에 팔고 마포구 합정동에 방 두칸짜리 전셋집을 구했다. 이후 김씨는 폭등하는 전셋값에 밀려 단칸방으로 살림을 옮겨야 했는데, 그새 인천 아파트는 3000만원으로 뛰었다. 기사는 “김씨 부부가 삶의 의욕을 잃어버렸다”고 전했다.

집값의 ‘숫자’만 달라졌을 뿐 2021년 부동산 시장을 관통하는 키워드인 영끌과 갭투자, 벼락거지, 부동산 블루 같은 말들이 30여년의 세월을 거슬러 오버랩된다. 기사에 따르면 당시 전국의 집값은 1년 반 만에 2배, 서울 강남지역 아파트는 3배나 올랐다. 기사는 국토개발연구원 자료를 인용해 무주택자의 60%가량은 비싼 집값 탓에 집을 살 능력이 없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나마 폭등하던 집값은 노태우 정부의 200만호 주택 건설이 현실화하면서 1991년을 기점으로 꺾였고 이후 10년간 안정세를 보였다. 우연히도 그날치 신문 12면에는 일산·분당 새도시 대규모 주택 건설을 홍보하는 정부의 전면광고가 실렸다.

‘집값 폭등 물려받은 ‘천형’의 세대’. 미친 집값에 절망한 지금의 2030세대에 꼭 맞을 듯한 이 문구의 출처도 거의 3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한겨레> 1993년 10월19일치에 이 제목으로 실린 기사는 당시 30대를 이렇게 설명한다. “사상 유례없는 집값 폭등을 지켜보면서 그 사회적·경제적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은 세대다. 세계에서 집값이 가장 비싸고, 집 없는 설움 또한 가장 큰 한국적 특수환경에서 30대는 내집 마련이란 과업을 ‘천형’처럼 짊어지고 가파른 산을 끊임없이 오르는 시시포스다.” 요즘 2030세대에게 기득권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그들의 부모 세대가 그 시절 집값 급등에 좌절한 청춘이었다는 게 낯설게 다가온다.

앞서 언급한 <한겨레> 창간 1주년 기획 기사는 “최근의 집값 폭등은 멀쩡한 중산층이라고 믿고 있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붕괴시켜버렸다. 도시 서민들은 삶의 목표를 잃어버렸고 허리띠를 졸라맨 지난날의 무의미함에 새삼 허망함을 느낀다”고 시대를 진단했다. 그리고 이런 물음을 던졌다. “재산이 아닌, 인간의 삶을 가능케 하는 삶터로서의 집은 영영 마련할 수 없는 것인가.”

그동안 정권은 여섯번 바뀌었고, 대한민국은 훨씬 더 잘사는 나라가 됐다. 촛불을 든 시민들은 불의한 권력을 내쫓았고, 경제민주화는 일상이 된 듯하다. 그런데도 30여년 전 물음은 여전히 허공을 맴돈다. 이른바 진보 정권에서 또다시 집값 광풍이 몰아쳤다. 더 늦으면 기회가 없을 것 같은 두려움에 30대는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산다. 영끌할 여유도 없는 이들은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을 외치며 절망한다. 이 사태에 어찌할 줄 모르는 무능한 정부, 끊임없이 이어지는 집권세력의 부동산 내로남불을 지켜보며 불편한 예감을 지울 수가 없다. 집으로 돈 버는 역사가 반복되고, 발 빠르게 기회를 잡은 이들이 결국엔 승자가 될 것 같다는 예감 말이다.

minerv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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