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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편집되지 않는 일상 / 정대건

등록 2021-04-09 16:19수정 2021-04-10 15:36

정대건 l 소설가·영화감독

비전공자들을 대상으로 단편영화 시나리오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수업에서 수강생들이 애써 쓴 시나리오에 대해 내가 가장 많이 한 말은 “덜어내세요, 덜어내면 더 좋아져요”였다. 시나리오 단계에서 편집하지 않으면 어차피 영화를 찍은 뒤 편집실에서 잘라낼 것이고 그렇게 되면 시간과 비용이 많이 날아간다고 덧붙였다. 나 역시 선생님들에게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것이고 직접 시행착오를 겪은 일이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지금 쓰고 있는 이야기에서 나도 머리 아프게 고민하고 있으면서 남의 시나리오는 잘만 지적했다.

영화에서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편집에서 아끼는 장면을 잘라내야 하는 일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몇년 전 혹한의 겨울, 고된 촬영 중에 가장 만족스러웠던 1분짜리 롱테이크 장면이 있었다. 누군가 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뭐냐고 물어보면 자신 있게 대답을 할 장면이었다. 편집실에서 그 1분이 들어간 93분 버전과 그 1분을 뺀 92분 버전을 신중하게 고민했다. 편집기사님과 의견을 나누고 최종적으로 그 장면을 빼기로 했다. 독립적인 장면으로는 좋지만 전체의 흐름상 길다는 이유였다. 그러한 선택에는 영화는 관객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내가 가장 만족하는 장면은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버전이 되었다. 감독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관객을 위해 빼야 하는 아이러니라니, 편집을 하면서 많이 배웠다.

우리는 드물게 일어나는 비일상적인 순간들을 영화 같다고 한다. 우리가 보내는 하루하루는 합격, 이별, 고백, 부상처럼 환희의 순간과 고통의 순간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고 대부분 잔잔한 일상이 계속된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나날들은 영화로 치면 편집실에서 잘려나갈 장면으로 이루어진 세계다. 나의 경우 방에서 나가지 않고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12시간을 넘게 앉아만 있을 때도 많다. 이 많은 시간을 편집되어 버리는 장면이라고 생각하면 그다지 즐겁지 않다.

그런데 내가 그런 즐겁지 않은 태도로 살아왔던 것 같다. 몇년 전까지 나는 내 인생이라는 영화 편집에서 잘려나가지 않을 순간에 훨씬 더 높은 가치를 두고 이력에 적힐 만한 성취를 위해 살아왔다. 그래서 편집될 장면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 일상을 소홀히 대했다. 안 먹고 안 쓰고 버티면서 그것이 훗날의 성취와 행복을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행복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남들이 축하해주는 드문 성취의 순간에도 나는 행복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물질적인 성공을 좇아서 그것을 이루었지만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세상에 흔한 것 같다. 그와 달리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왔지만 경제적 어려움 이외에도 생각처럼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비교적 흔치 않은 것 같다. 이런 이야기도 인생을 살아보고서야 배우는 시행착오의 과정이 아닐까. 그런 일을 겪고 나니 행복에 대한 나의 가치관도 변했다. 누가 대신 살아주지 않는 인생에서 행복도 누군가 대신 느껴주지 않는다. 이제 내게 행복은 거창한 성취가 아니라 잠들기 전에 마음의 불편함이 없는 상태를 일순위로 두는 것, 남의 것이 아닌 나의 것을 하는 거다.

흔히 자기 인생의 감독은 자신이라고 한다. 인생에 정답은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어렵다. 희망적인 건 인생은 영화처럼 데드라인에 맞춰 관객에게 선보이기 위함이 아니라는 거다. 편집에서 잘려나간 장면들은 쓸모없이 폐기되지만 우리의 일상은 그 누구도 가위질할 수 없다. 내가 보고 싶은 버전, 내가 원하는 버전으로 살기 위해서 내 인생의 감독판을 계속 수정해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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