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토론수업에서 어떤 학생이 토로한 “교수님 세대는 투쟁을 선택했지만 우리 세대는 경쟁을 선택했습니다”란 말이 떠오른다. 투쟁 대신 경쟁이라는 이 세대들의 이러한 태도가 결국은 이 체제의 논리에 순응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보수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다른 여러 선택지들의 하나가 아니라 거의 유일한 선택지라는 점에서 그 보수성은 눈물겨운 보수성이다.
김명인ㅣ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
4·7 전국 지방자치단체장 재보궐선거를 지켜보며 전임자의 잔여 임기 1년을 채우는 작은 선거에 대해서 지나치게 과한 의미 부여가 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 선거 국면에서 나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선거 결과가 아니라 관련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세대별 민심의 향배였다. 조사 시점과 조사 방법, 조사기관에 따라 상당한 편차가 존재하지만 대체로 40대에서는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후보 우세, 20~30대와 60대 이상에서는 야당인 국민의힘 후보 우세, 그리고 50대에서는 경합 양상으로 나타났는데 선거 결과가 아닌 사전조사라는 한계가 있다고 해도 이것은 확실히 과거의 세대별 투표 양상과는 크게 달라진 부분이다. 과거에는 대체로 정치적으로 중도자유주의적 정당(현 더불어민주당)이 20~30대에서 우세, 40대에서 경합, 50대 이상에서 보수주의 정당(현 국민의힘) 우세가 일반적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주목을 끈 것은 지난 대선과 총선 때만 해도 민주당 승리의 원동력이었던 20~30대 청년층의 반민주당화 현상이었다.
물론 전혀 예상할 수 없던 일은 아니었다. 신자유주의의 승자독식 체제를 살아가던 젊은 세대에게 깊은 호소력을 가졌던 현 정부의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라는 슬로건은 ‘조국 사태’ 이후 매우 의심스러운 것으로 변질되었으며, 최근의 부동산값 폭등과 엘에이치(LH) 직원들의 신도시 예정지 투기 등은 그 실망감을 분노로 바꾸어 놓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재보선 자체가 민주당 소속 지자체장들의 성범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면 청년세대의 ‘정권심판론’ 선택은 차라리 자연스러운 결과다.
여전히 현재의 정치 구도를 ‘수구보수 대 개혁진보’로 보고 민주개혁의 완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상당수의 친여 세력 입장에서는 청년세대의 표심이 반민주당을 넘어 국민의힘 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우려스러운 일로 비칠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을 두고 청년세대의 보수화를 걱정한다든가, 여당의 시장 후보가 말한 것처럼 그들의 과거 역사에 대한 경험치 부족으로 원인을 돌리는 것은 단순함을 넘어 전형적인 타자화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논리가 이를테면 70~80년대 민주화 투쟁에 나서던 젊은 세대에게 6·25 전쟁과 빈곤의 경험을 몰라서 그런다고 타박하던 당시 기성세대의 논리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지금의 2030세대에게는 80년대 민주화 투쟁의 기억이라는 것은 50대 민주화 투쟁 세대에게 있어서의 일제하 독립운동의 기억만큼이나 멀고 낯선 것이다.
생애의 대부분을 신자유주의 체제의 지배 아래서 살아온 이들에게는 현재의 열악한 삶을 견디고 열심히 일을 하면 언젠가는 대박이 터져서 먹고살 만한 날들이 오리라는 산업화 세대의 기대,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민주화가 되면 불평등도 빈곤도 억압과 공포의 기억도 사라지는 해방의 날이 오리라는 민주화 세대의 기대 같은, 확실하게 보장된 미래가 없다. 산업화 시대의 물질적 풍요도, 민주화 시대의 이념적 영예도 이들의 ‘경험치’ 안에는 존재할 여지가 있을 턱이 없고 오로지 기성세대들의 ‘라떼 담론’ 속에서나 존재하는 낡은 역사 유물들일 뿐이다. 자본 이동의 자유와 고용 유연화의 두 축을 기초로 전세계적 규모의 고도 노동착취 시스템을 구축하게 된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삶의 어떤 장기 안정적 전망도 가질 수 없는 게 이들의 삶이다. 이들 앞에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실낱같은 기회를 잡아 ‘안정된 미래’ 획득에 성공하거나, 아니면 이에 실패해서 평생 프레카리아트적인 불안한 미래를 전전하거나의 가파른 양자택일의 기로만 놓여 있다.
작년 한 온라인 토론수업에서 어떤 학생이 토로한 “교수님 세대는 투쟁을 선택했지만 우리 세대는 경쟁을 선택했습니다”란 말이 떠오른다. 투쟁 대신 경쟁이라는 이 세대의 이러한 태도가 결국은 이 체제의 논리에 순응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보수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다른 여러 선택지들의 하나가 아니라 거의 유일한 선택지라는 점에서 그 보수성은 눈물겨운 보수성이다. 그리고 모든 젊음에는 본질적으로 급진성이 내장되어 있으며 이는 어떤 식으로든 기성의 레짐을 전복하는 저항적 에너지로 폭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 그 보수성은 표면적이며 한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2030세대가 모두 신자유주의적 현실에 완전히 찌들어버려 새로운 미래를 향한 어떤 생각도 포기한 것이 아님은 이미 지난 촛불혁명 과정에서 우리가 목도한 바 있다. 다만 우리가 진정 걱정해야 할 것은 지금 가장 절박하게 이 시대를 경험하고 있는 그들에게 잠재된 급진적 저항의 에너지가 어떤 출구로 향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지금 2030세대에게 기득권 세력으로 군림하고 있는 기성세대의 경우엔 근대화론이 되었든 민족주의가 되었든 계급혁명론이 되었든 그 뒤를 따르기만 하면 번영과 희망의 새로운 미래를 약속해주던 확실한 이데올로기적 좌표와 그에 따른 실천 프로그램이 있었던 근대 기획의 시대를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은 자본주의 자체도 그 지속가능성을 의심받고 있지만, 그 대안을 위한 모색들도 대부분 미궁에 빠져 있는 혼돈의 포스트모던 시대이다. 게다가 이 시대가 더 고약한 것은 그 어떤 대안적 사상과 운동이라 할지라도 권위주의와 집단화를 거부하는 포스트모던 특유의 해체적이고 탈중심적인 경향 때문에 쉽사리 유의미한 규모와 조직을 가지는 정치운동으로 집결되지 못하고, 결국 개인의 선택에 맡겨지거나 소수성과 배타성을 특징으로 하는 정체성 정치의 영역으로 퇴화하게 된다.
이처럼 진지한 대안적 사상과 실천들이 휘발되는 자리에 들어서는 것이 현재 전세계적으로 성행하고 있는 포퓰리즘이다. 신자유주의 체제를 벗어날 어떠한 체계적 전망도 실천적 프로그램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대중들이 마취제를 찾는 심정으로 당장 그럴싸한 현실 타개의 환상만을 제시하는 정치 모리배들에게 자신의 미래를 위탁하는 것이 포퓰리즘의 본질이다. 과연 우리의 2030세대와 그 후속 세대들이 선배 세대들에 대한 불만과 냉소를 넘어서 이러한 포퓰리즘의 광신도도, 신자유주의의 자발적 노예도 아닌, 역사의 주체로 설 수 있는지, 또한 그러기 위한 어떤 사상적, 실천적 준비를 해나가고 있는지, 과연 우리 사회에 그런 여지가 있기나 한지 그것이 이번 재보궐선거가 내게 남겨준 가장 큰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