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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박주민이 남긴 ‘도그지어’ / 이주현

등록 2021-04-05 15:00수정 2021-04-06 02:38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지난해 8월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당 대표 경선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지난해 8월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당 대표 경선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주현 ㅣ 정치부장

한달 전쯤, 아침마다 눈이 시뻘게져서 출근했다. 일이 고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새벽 두세시까지 넷플릭스에서 드라마 <보르겐>(여총리 비르기트)을 보느라 잠이 부족해서였다. 2010년에 덴마크에서 방영된 <보르겐>은 ‘중도당’ 당수인 비르기트의 정치적 성장기다. 그는 다양성이라는 중도당의 핵심 가치를 견지하면서도 정당 간 끊임없는 협상과 타협, 국민들에 대한 공감 능력과 정무적 결단력으로 유능한 정부를 일궈낸다. 매번 성공적으로 장애물을 뛰어넘는 비르기트지만 그에게도 아킬레스건이 있었으니 바로 ‘가족의 이해충돌’ 문제였다. 덴마크의 한 에너지 기업이 중앙아시아 국가와 대규모 풍력발전기 수출계약을 맺게 되었는데, 이 사실을 미리 인지한 비르기트는 이해충돌 논란을 피하기 위해 남편이 보유한 해당 기업의 주식을 몽땅 팔게 한다. 남편도 주식 문제까진 어찌어찌 참고 넘어갔다. 하지만 공직자 배우자를 둔 탓에 평소 꿈꿔오던 기업의 임원 자리까지 내놓게 되자 폭발해버린다. 당시 덴마크 정부는 첨단 무기 구매 계약을 앞두고 있었는데, 남편을 임원으로 채용한 회사가 이 무기 제조회사의 납품업체임을 비르기트가 알게 된 것이다. 남편은 회사에 사표를 낸 뒤 가출해버리고, 결국 부부는 이혼에 이른다.

이번 4·7 재보선에서 가장 뜨거웠던 쟁점은 이해충돌이었다.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할 범죄적 행위는 아니었지만 공직자에게 기대하는 윤리의식을 저버린 사건이 여럿 있었다. 전월세 5% 상한제 등 임대차보호법 개정을 주도한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 법안을 대표발의한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법 통과 직전에 아파트 세입자에게 임대료를 9~14% 올린 것이 대표적이다. 차라리 무능은 견뎌도 위선은 참을 수 없는 게 인간의 본성 아닌가.

덴마크 정치판이 한국보다 얼마나 깨끗한지는 잘 모르겠다. 드라마상으로는 한국 정치 뺨친다. 협잡과 암수가 판치고 음모와 질시가 난무한다. 비르기트의 어린 딸에게 접근해 사진을 찍는 파파라치가 있고 작은 약점을 꼬투리 잡아 침소봉대하는 ‘기레기’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런 혼탁함 속에서도 중심을 잡는 것은, 자신의 공적인 결정이 가족의 사적 이해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먼저 따져보는 비르기트의 철저함이다. 공공의료를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우울증을 앓는 십대 딸을 민간병원에 보내는 일이 표리부동한 일인지 점검하는 것 말이다. 이는 비르기트의 윤리의식이 높아서일 수도 있지만, 그가 가정을 건사하고 꾸려가는 생활인의 감각과 상식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았다. 만약 비르기트가 임대차보호법을 발의했다면 그는 반드시 자신의 아버지가 임대료를 얼마나 받는지부터 확인했을 것이다.

김상조·박주민의 임대료 인상 문제로 민심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김태년 원내대표가 직접 나서 ‘내로남불’을 사과했다. 문제가 터질 때마다 항상 ‘우리는 차악, 저쪽은 최악’이라는 식의 반응을 보여왔던 민주당에서 이례적인 일이었다. 김 원내대표에게 ‘공개 경고장’까지 받았던 박주민 의원은 논란이 일어난 지 사흘 만에 다시 재계약을 맺었다. “방심과 불철저했음을 반성하는 의미로 보인다. 이게 민주당이고 이게 박주민”이라는 동료 송영길 의원의 말에 유권자들이 얼마나 공감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도그지어(Dog’s ear)라는 말이 있다. 개의 귀라는 뜻도 있지만, 잊고 싶지 않은 문장이 적힌 책장의 한 귀퉁이를 삼각형으로 접어놓는 일을 뜻한다. 나는 이번 4·7 재보선을 지켜보면서 또 하나의 ‘도그지어’를 추가했다. “내로남불 자세를 혁파하겠다. 민주당은 개혁의 설계자로서 스스로에게 더 엄격하고 단호해지도록 윤리와 행동강령의 기준을 높이겠다”는 민주당의 약속 말이다.

소설가 김연수는 도그지어에 대해 말하면서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어떤 점에서 그렇게 접어놓은 삼각형들을 책임진다는 뜻이기도 하다”고 적었다. ‘내로남불’의 덫에 걸려 고전한 민주당은 재보선 성적표 결과에 상관없이 깊은 성찰과 혁신의 길을 꾀할 수밖에 없다. 유권자들이 마음속에 접어놓은 수많은 삼각형들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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