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목ㅣ번역가·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조지 매클렐런은 미국 내전 초기 북군 총사령관이었다. 그러나 북군의 최종 승리를 이끈 그랜트는 그를 이 “전쟁의 수수께끼”로 여겼다. 북부의 구원자로 환영받던 장군이 전쟁 종결의 결정적인 순간에 번번이 뒤로 물러선 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제임스 맥퍼슨의 퓰리처상 수상작 <자유의 함성>은 이것이 단순한 전술적 실수가 아니라 “메시아 콤플렉스”에 사로잡혔던 한 인간의 한계라고 본다.
매클렐런은 위대해지려고 태어난 사람 같았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웨스트포인트를 차석으로 졸업했으며 20살 때 멕시코 전쟁에서 공병 장교로 공을 세웠다. 이후 민간 부문에서 경영자로 일하다가 1861년 전쟁이 터지면서 서른네살의 나이로 북군 서열 2위의 장군이 되었고 첫 남북 육상전에서 승리했다. 북부는 그를 “젊은 나폴레옹”으로 찬양했다. 사실은 부하가 그의 소심함을 이겨내고 얻어낸 승리였지만, 이때 이미 차기 민주당 대권주자로 거론되던 매클렐런은 이 독배와 같은 찬사를 마시고 “내가 이 땅의 최고 권력”이라는 생각에 취했다는 것이 맥퍼슨의 평가다.
그는 처음부터 행정부와 군부 지도자들이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보았고 연방을 유지해야 한다는 대의 외에는 공화당 정권과 공감대가 없었다. 북군의 장군이 아니라 민주당원으로서 또 나폴레옹의 미래를 꿈꾸는 사람으로서 상황을 보았다. 심지어 나중에 총사령관 지위에서 밀려난 뒤에는 전장에서 위기에 처한 동료 포프 장군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기도 했다. 그는 사이가 나쁜 “포프가 실패하기를 바랐고” 공화당 정권이 “공포를 느껴봐야만 나에게 중요한 명령 권한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수많은 젊은 병사의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 그가 내린 판단이었다. 링컨이 이때 괴로워하면서도 그를 완전히 내치지 못한 것은 그가 “자신은 싸우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싸울 준비를 갖추어주는 데는 뛰어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매클렐런은 군을 추스르는 데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고 병사들에게도 나폴레옹처럼 인기가 높았다.
이 점이 링컨이 애초에 그를 총사령관까지 끌어올린 이유였고, “승리만 가져다준다면 그의 말구종이라도 하겠다”며 오랜 기간 그에게 인내심을 보여준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승리를 가져다줄 능력은 없었다. 마음은 나폴레옹이었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늘 준비 부족이라며 움직이지 않았고, 훨씬 많은 병력을 갖고도 중과부적이라며 공격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두려움을 위장하기 위해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했다.” 결국 매클렐런이 십만 대군을 끌고 적의 수도 코앞까지 다가갔다가 물러서면서 전황은 혼전으로 빠져들었다.
장기전으로 들어가자 북부는 총력전으로 방향을 틀었고 전략적으로라도 노예해방을 해야 하는 상황이 닥쳤다. 만일 매클렐런이 조기에 전쟁을 끝냈다면 그의 바람대로 연방제와 노예제가 둘 다 유지되었겠지만, 역사는 그의 한계를 이용하여 전에는 아득해 보였던 노예해방선언을 끌어내고 말았다. 전쟁은 4년이 지난 1864년 대선 때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민주당은 이것을 “실패한 전쟁”으로 규정하여 휴전을 외쳤고, 매클렐런은 장군으로서 끝내지 못한 전쟁을 대통령으로서 끝내겠다고 군복을 입은 채 후보로 나섰다. 처음에는 링컨도 매클렐런의 당선을 예측할 정도였지만 애틀랜타 함락으로 분위기가 반전되면서 링컨이 일반투표의 55%를 가져가 재선에 성공했다. 의미심장했던 것은 매클렐런이 정치적 자산으로 여겼던 군인들의 표가 70% 이상 링컨에게, 전쟁 승리에 갔다는 점이다. 역사는 매클렐런의 꿈을 깨뜨리며 자기 과제를 완결했고 대가로 링컨의 생명을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