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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손을 떠는 영웅 / 홍인혜

등록 2021-04-02 13:35수정 2021-04-03 02:34

홍인혜 ㅣ 시인

며칠 전 버스에서 일어난 일이다. 버스는 한층 촘촘해진 봄 햇살 속을 나른하게 달리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이따금 다음 정거장을 알리는 방송만이 정적을 깨고 차내를 맴돌다 누군가의 어깨에 먼지처럼 내려앉았다. 나는 이어폰을 꽂고 몽상에 빠져들었다. 수많은 간판들이 책장처럼 넘어가고 버스가 몇 개의 교차로에서 몸을 틀자 내 머리는 창으로 파고들었다. 차 안과 바깥의 경계에 고이듯 현실과 꿈의 사이에서 혼몽해져가고 있었다.

그렇게 바퀴 달린 평화에 실려 잠이 들락 말락 하던 차였다. 이어폰과 귓구멍 사이를 비집고 고성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소음도 소음인데 차내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동물적인 직감이 들었다. 수상한 수런거림과 일렁이는 불안이 감지됐다. 나는 이어폰을 귀에서 뺐다. 바로 귀에 꽂히는 소리는 이것이었다. “마스크 없이는 탑승 안 됩니다!” 이 말은 저 앞자리 운전석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주변을 살피니 맨얼굴로 탑승한 승객 한 명이 보였다.

그것은 대단히 낯선 감각이었다. 버스 안에서 타인의 온전한 얼굴을 본다는 것이 말이다. 상황을 파악하건대 누군가 마스크 없이 막무가내로 차에 오른 모양이었다. 그는 기사님에게 큰 소리로 항변하고 있었다. 곧 내릴 테니 그냥 갑시다 하는 유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원칙은 원칙, 기사님은 당장 하차하시라고 외치고 있었고 문제의 승객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끄집어낼 수 있으면 해보라는 투였다.

차원을 잡아 늘인 듯 여유로웠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팽팽해졌다. 모두 당황하고 있었다. ‘대중교통에선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는 원칙은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이를 어기는 사람을 어떻게 제재해야 하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로 오랜만에 마주한 맨얼굴, 그 고집스러운 표정을 보며 모두 겁을 먹고 있었다. 전 국민이 조심스레 따르고 있는 룰에 대놓고 어깃장을 부리는 사람의 돌출성이 두려웠고 그가 공기 중에 흩뿌리고 있는 체액이 두려웠다. 이럴 땐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때였다. 칼끝에 선 듯 곤두선 분위기 속에서 한 학생이 그에게 다가갔다. 저 작은 학생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모두가 숨을 죽이고 바라봤다. 그 순간 학생이 뭔가를 내밀었다. 뜯지 않은 새 마스크였다. 비상용으로 지니고 다니던 여벌인 듯했다. 아, 저런 방법이. 문제의 승객은 마스크를 한번 학생을 한번 바라보더니 뜻밖의 태도를 취했다. 고개를 까딱하더니 순순히 마스크를 뜯어 착용한 것이다.

버스는 다시 도로를 부드럽게 달리기 시작했고 차 안에는 정돈되지 않은 긴장감이 조금 더 맴돌다 녹아 없어졌다. 고함치던 승객의 얼굴도 희디흰 마스크 뒤로 숨었다. 되찾은 고요 속에서 생각했다. 오늘 이 버스의 영웅은 저 학생이라고.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기지와 용기로 우리의 오후를 구제했다고.

그리고 사실 나는 보았던 것이다. 마스크를 건넬 때 파르르 흔들리던 그 손끝을. 어찌 반응할지 모를 무뢰한에게 다가갈 때 학생은 사실 떨고 있었다.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대다수가 눈만 끔뻑이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황에서. 그럼에도 우리의 영웅은 행동했다. 떨면서도 그에게 다가갔다. 나는 생각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움츠러들지 않고, 누가 뭐래도 의연하고, 공포라곤 모르는 용감한 사람’은 허상이 아닐까. 실제로 많은 영웅들이 벌벌 떨면서도, 무서워 이를 악물고서도, 눈물을 꾹 참으면서도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히어로는 특수한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거나 외계 전파에 영혼이 각성된 존재가 아니었다. 다 같이 마음이 졸아붙은 와중에도 떨리는 손을 기어코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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