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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아홉개의 빈방 / 김영준

등록 2021-03-26 13:49수정 2021-03-27 13:32

김영준ㅣ열린책들 편집이사

‘사람은 평생 자기 뇌의 일부만 사용한다’는 것은 백년간 유행한 유사과학 이론이다. 이에 따르면 보통 사람은 뇌의 10%를 사용할까 말까 한데 아인슈타인은 30%나 사용했다고 한다. 어떤 버전에서는 아인슈타인이 직접 그렇게 밝히기도 한다(?). 한때 학교에서도 들을 수 있던 믿거나 말거나 식의 이야기가 자취를 감추게 된 건 다행한 일이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우리 뇌는 10%만 사용되기는커녕 거의 언제나 100% 가동 중이다. 더구나 뇌는 막대한 유지비가 드는 비싼 기관이므로 90%를 사용 안 하고 놀려 둔다는 것은 진화론적인 관점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뇌를 10%만 사용한다는 신화’는 노력을 독려하는 자기계발 담론에 단골로 등장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진짜 매력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방 열개짜리 커다란 집에서 사는 것 같은 느낌을 준 데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주인공은 지금 쓰는 방 외에 빈방 아홉개가 더 있는 것도, 그게 모두 자기 것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전부터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 분발하려는 생각보다는 모종의 느긋함에 잠기게 되곤 했다. 사람을 닦달하는 자기계발서의 역설 중의 하나는 항상 이런 식의 예기치 못한 태만함의 공간을 준다는 것이다. 물론 과학자들에 따르면 그 방들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는 건 착각이고, 당신이 알든 몰랐든 방들은 필수적인 기능을 수행해온 것이다. 여기서 기묘한 점은, 10% 신화가 과학적으로 반박된 뒤에도 그 느긋한 느낌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배가된다고나 할까. 그 방들이 과학적으로도 내 방이었고 나 모르게 나를 위해 여러 일들을 해주고 있었음을 확인하는 것에는 약간 감동적인 면이 있다.

뇌의 90%가 놀고 있다고 믿더라도 머리를 가볍게 하겠다고 90%를 잘라 낼 생각을 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뇌를 보조하는 기억장치의 하나인 책이 문제가 되면 우리는 꽤 가차 없어진다. 사실 보조 기억장치 취급을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집에 새로 들어온 책은 어딘가 안 보이는 데 꽂히기 전까지는 제자리를 찾는 데 실패한 가구처럼 여기저기를 떠돈다. 이미 이때부터 책은 집 밖으로 치우는 게 바람직한 어수선한 사물로 여겨진다. 여기서 책에 불리할 언급 하나를 추가하면, 뇌의 90%가 놀고 있다는 것은 거짓이지만 집의 책 90%가 놀고 있다는 것은 매우 높은 확률로 진실이라는 것이다. 사용하지 않는 것들을 과감히 버리고 단순한 삶을 지향하자는 트렌드가 대세라는데, 여기에는 어떤 친숙한 죄책감을 파고드는 게 있다. 이때 책보다 과감하게 처리할 수 있어 보이는 것도 많지 않을 듯하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자리만 차지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보편적인 적대감에 매우 익숙해졌다. 정치에서든 생활에서든 말이다. 말년에 보르헤스는 시력을 완전히 잃은 뒤에도 계속 책을 사들였다. 읽을 수는 없어도 그게 집 안 어느 구석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낀다고 했다. 보르헤스는 ‘현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데, 이런 이야기는 체험되기 전에는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학생 시절 집안 사정 때문에 집의 책 대부분을 버린 적이 있었다. 좋지 않은 경험이었는데 해방감도 없진 않았다. 아직도 나는 그 책들을 헌책방이나 뜬금없는 장소, 예컨대 구두 수선집에서 발견하며 깜짝 놀라는 꿈을 꾸곤 한다. 그 책들이 이런 방식으로라도 계속 곁을 맴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부재를 슬퍼하는 것보다는 옆에서 행복감을 얻는 편이 훨씬 나은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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