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분화구’라는 말을 듣는 달 과학자는 입이 근질근질하고 자꾸만 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고 싶은 마음이 든다. 달 충돌구를 그냥 ‘크레이터’로 불러준다면 혼동을 막을 수 있고 나의 마음에도 평화가 찾아올 텐데. 그러나 ‘유튜브 크레이터’ 교육 과정은 종종 개설되는 데 반해 ‘달 크레이터’ 강의는 찾기 힘든 것으로 보아 조만간 이 단어를 내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심채경|천문학자
초등학교 교실 뒤편에 아이들의 꿈을 적어 열매처럼 매달아놓은 나무 그림이 있었다. 그 ‘꿈 나무’를 요모조모 살피다 눈이 번쩍 뜨였다. “크레이터.” 최근 몇년간 내 연구 주제가 달과 수성의 운석충돌구, 즉 “크레이터”이기 때문에 일단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의아했다. 자라서 충돌구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닐 테고, 천문학자나 지질학자, 고고학자가 되어 충돌구를 연구하고 싶은 것일까?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친구에게 물어봤더니 그게 요즘 애들 장래희망 1순위라고 했다. ‘티브이 속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처럼 엠시(MC)가 되어 셀러브리티와 토크를 나누고,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를 만들다 소셜 인플루언서가 되어 피피엘(PPL)도 많이 받으며 플렉스하고 싶은’, 그 직업의 이름을 정확히는 모르지만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되고픈 아이들. 그럼 그렇지. 미래의 내 동료인가 하고 살짝 설렜는데, 난.
초등학생뿐만 아니라 전 연령층을 대상으로 하는 ‘유튜브 크레이터’ 양성 교육 과정을 인터넷에서 종종 발견한다. 미래의 유튜버들에게 ‘크레이터’라는 단어를 선뜻 양보하고 싶지는 않다. 달에 있는 크레이터 대부분은 운석이 떨어져 생긴 ‘충돌구’인데, ‘분화구’로 잘못 표기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큰 운석이 떨어지면 지하 깊은 곳의 마그마가 배어 나오기도 했지만, 그것을 분화구라고 부르지는 않고, 실제 분화구는 극히 드물다. 그 외에 화산에 관련된 지형은 얕은 그릇을 엎어놓은 모양의 언덕과 용암이 흘러갔던 둥근 계곡 정도다. 달의 마그마는 지구의 마그마와는 성질이 달라서, 조금 다른 형태의 흔적을 남겼다.
‘달 분화구’라는 말을 듣는 달 과학자는 입이 근질근질하고 자꾸만 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고 싶은 마음이 든다. 달 충돌구를 그냥 ‘크레이터’로 불러준다면 혼동을 막을 수 있고 나의 마음에도 평화가 찾아올 텐데. 그러나 ‘유튜브 크레이터’ 교육 과정은 종종 개설되는 데 반해 ‘달 크레이터’ 강의는 찾기 힘든 것으로 보아 조만간 이 단어를 내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크리에이터’를 대체할 만한 단어를 찾기는 쉽지가 않다. 기획자나 제작자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고, 국립국어원의 안내를 따라 ‘광고 창작자’라고 하기에는 광고만 만들지도 않기 때문이다. 애매한 용어는 과학 분야에도 아주 많다.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서 통용되는 과학 분야 자체가 서양에서 발원한 것이기도 하고, 서로 다른 언어 사이를 오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어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의 영어권 인터뷰 통역을 맡은 최성재 감독은 내용뿐 아니라 미묘한 뉘앙스와 농담까지 그대로 통역했다는 찬사를 듣는다. 그건 아마 그가 우리말도 영어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화라는 장르와 봉준호 감독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토록 ‘신성한 통역’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런 사람이 모든 시기, 모든 분야에 있을 리는 없다. 혹여 과학계의 최성재가 존재한다고 해도 끝내 우리말로 옮기지 못한 채 남겨둘 용어가 많을 것이다. 크레이터 정도면 그래도 ‘운석충돌구’라는 적확한 단어가 존재하지만, 대개는 우리말로 바꿔 부를 단어가 마땅치 않아 영어식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과학자들의 대화를 가만히 들어보면 조사만 우리말인 문장이 많다. 우리말을 몰라도 그 분야 전공자라면 알아들을 수 있을 수준이다. 과학자들의 언어는 한국어도 영어도 아닌, 정체불명의 국제공용어다.
어느 날, 미국인 공동연구자 하나가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물어왔다. “코딩할 때 한글이 아니라 영어를 써?” 포트란이니, C++니, IDL이니 하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한국, 중국, 일본 과학자도 똑같이 사용한다는 사실을 이제 막 깨달았다고 했다. 나는 ‘영어가 모국어인 인간이여, 그동안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우리는 생각보다 똑똑하다네’ 하는 표정을 지으며, 당신이 쓰는 것과 똑같은 걸 쓴다고 말해줬다. 한국인이 한국에서만 사용할 소프트웨어를 한국인 개발자가 만든다 해도 영어로 코딩한다는 사실에 그는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요즘은 할머니·할아버지도 햄버거 가게에서 키오스크로 오더할 때 테이크아웃 여부를 묻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는 사실도 말해줄까 말까,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는 동안 내 얼굴에서는 “우리는 생각보다 똑똑하다네” 표정도 쏙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