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민|자유기고가
옛 회사 선배가 밥을 사준다고 양꼬치 집에서 보자고 했다. 내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말은 못 했다. 안 했다. 얻어먹는 주제에 까칠해 보일까 싶기도 했다. 그게 다는 아니다. 못 이기는 척 고기 먹어볼 작정이었다. 선배 눈치 봤다는 건 내가 나한테 하는 거짓말이다. 결정권을 상대에게 넘기고 죄책감을 덜려는 속셈이다. 이렇게 은근슬쩍 닭갈비 먹은 적도 있다.
양꼬치 집 냄새가 근사했다. 10평 남짓 가게는 다 빠지지 않은 연기로 매캐했다. 잘게 썰린 양고기가 노릇하게 익어갔다. 다른 테이블에서. 선배는 양꼬치가 아니라 가지튀김과 볶음밥을 시켰다. 나는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실은 고기를 먹지 않는데 잘됐다”고 말했다.
6개월 전만 해도 나는 지하철에서 울었다. 한승태 작가가 쓴 책 <고기로 태어나서>를 읽다 그랬다. 작가가 공장식 양계장, 양돈장, 개농장에 취직해 겪은 대로 썼다. 알을 낳지 못하는 수평아리는 쓰레기 마대자루에 담겼다. 거기서 깔려 끝까지 “삐악”거리다 죽었다. 암탉들은 가로세로 50㎝, 높이 30㎝ 우리에 네마리씩 처박혀 알을 낳았다. 부리는 잘리고 털은 다 빠진 닭이 닭에게 깔려 죽었다. 원래는 세마리씩 한 우리에 넣었는데 이 회사 이사가 “생산성을 높이라”고 해 한마리씩 추가됐다. 육계로 개량된 닭들은 32일 만에 도축된다. 빨리 살이 붙지 않은 닭은 그 전에 목이 비틀린다. 돼지도 살이 빨리 찌지 않으면 바닥에 패대기쳐 죽인다. 생후 한달쯤 생식기를 뜯어낸다. 그래야 육질이 부드럽다. 6개월이면 도축된다. 개농장에서 개는 음식물 쓰레기를 먹다 죽는다. 전기봉으로 감전시키거나 목을 매단다. 인간이 더 싸게, 더 많이, 더 맛있게 먹어야 하니까. 그때 고기를 끊었다. 그 고통이 전해져 결심까지도 필요 없었다. 그런데도 달걀, 우유, 생선은 끊을 자신이 없었다.
6개월 만에 나는 호시탐탐 고기 먹을 기회를 노린다. 남의 고통은 그렇게 멀고 내 입의 즐거움은 강력하다. 죄책감이 올라오긴 한다. 이런 죄책감을 없애는 데는 냉소가 최고다. 효과적이고 폼 나는 술책이다. “나 하나 안 먹는다고 세상이 바뀌어?” 내 잘못 아닌 거다. 세상이 내 힘으로 어떻게 해보기엔 너무 더러운 거지.
30살 가을씨는 자기가 “냉소적”이라고 했다. 세상이 나아질 거라고 한 톨도 믿지 않는단다. 그는 2019년 7월 동물해방공동체 직접행동(Dxe Korea)이 한 대형마트에서 벌인 방해시위 동영상을 봤다. 시위대는 포장된 고기 위에 국화꽃을 놓았다. 노래를 불렀다. “인간들만이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하지는 마세요. 그대 마음의 문을 활짝 열면 온 세상이 연결됨을 느껴요.”(‘바람의 빛깔’ 개사) 이어 영화 <레미제라블> 속 ‘민중의 노래’ 가사를 바꿔 불렀다. “너는 듣고 있는가, 동물의 비명 소리를.”
올해 3월3일 가을씨는 한 백화점 정육 코너에서 함께 노래했다. “처음엔 비웃었어요. 지금도 이런 노래가 세상을 바꿀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백화점까지 가는 길에 육식 식당이 가득했어요. 우리가 노래하는 중에도 고기 사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제가 거기 섰던 까닭은 “너는 듣고 있는가”라는 노랫말 때문이었어요. 어느 순간 저한테도 그 비명이 들렸어요. 냉소는 스스로를 높이 평가하는 태도라고 생각해요. 제가 뭐라고 저 때문에 세상이 변하겠어요. 큰 의미 같은 건 없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거나 해야지 그래요. 안 할 이유도 없잖아요.”
‘냉소한다. 그래서’ 다음에 ‘행동한다’가 나올 수 있다는 걸 그를 보고 처음 알았다. 한 사람이 사는 세상은 그 사람이 공감각하는 고통의 경계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