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한 l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제목만 읽고 오해하지 마시길. 내가 혼술(혼자 마시는 술)의 대가인 건 결코 아니다. 나는 혼술계에 입문한 지 얼마 안 된 초심자다. 여럿이 어울려 잔이 깨질 듯 건배하고 떠들며 마시는 걸 좋아하던 내가 혼술의 영토에 발을 내디딘 건 불과 몇년 전, 아는 이 아무도 없는 낯선 도시에서 연구년을 보내던 때였다. 매일 비가 내리는 ‘잠 못 이루는 밤’의 도시 시애틀에서 나는 무궁무진한 종류의 아름다운 맥주를 만나 혼술, 더 정확히 말하면 홈술(집에서 마시는 술)의 매력에 조금씩 빠져들게 되었다.
다양한 종류의 맥주가 선사하는 황홀한 맛이 호기심을 계속 자극하긴 했지만 혼자 맞이하는 축제는 뭔가 허전했다. 신앙심 없는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것처럼, 반찬 없이 쌀밥만 먹는 것처럼 지루했다. 자연스레 페이스북이나 야구 하이라이트 같은 술친구를 들이기 시작했다. 비록 다음날 아침이면 뭘 봤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지만, 넷플릭스도 극강의 파트너가 되었다. <술 취한 식물학자>(에이미 스튜어트 저)와 같은 아름다운 책을 읽노라면 혼술에 한층 풍미가 더해졌다. 심지어 읽기 싫던 어려운 논문들도 혼술의 동반자가 되자 술술 읽혔다.
코로나 시대를 통과하며 혼술 취미는 한층 진화하고 있다. 맥주 한 캔이면 충분했는데 언제부턴가 두 캔은 마셔야 고단한 하루의 피로가 풀린다. 동네 편의점에만 가도 단돈 만원으로 세계 곳곳의 이름난 맥주를 네 캔이나 살 수 있지 않은가. 맥주가 지루해질 때는 와인으로 갈아타면 된다. 대기업들까지 수입에 발 벗고 나선 덕에 혼술상에 어울리는 가성비 좋은 와인을 쉽게 구할 수 있다. 잠깐만 검색하면 갖가지 칵테일 레시피를 당장 만날 수 있다. 이 세상 온갖 식물이 선물하는 황홀한 취기가 감염병에 움츠러든 도시인에게 잠시의 여유와 자유를 준다.
혼술이 그만 습관으로 굳어지면 어떡하나. 집에서 혼자 긴장감 없이 술을 마시면 자신도 모르게 양과 빈도가 늘어나 알코올 의존증에 빠지기 쉽다는 전문가들의 경고성 조언을 읽으면 겁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주변 지인들에게 은근슬쩍 물어보면 코로나 시절을 겪으며 혼술계에 입문한 자들이 수두룩하다. 쓰레기 분리배출할 때 보면 알루미늄 캔 담는 통이 매일 넘쳐나고 유리병 모으는 자루도 연일 만석이다. 혹시나 하고 찾아보니 주류시장 동향에 대한 한 정부기관의 보고서가 눈에 띈다. 코로나19 이후 술 마시는 장소로 응답자의 87.3%가 ‘집’을 꼽았으며, 술 마시는 상황에 ‘혼자서’라고 답한 비율이 45.2%라고 한다. 나만 혼술과 홈술 즐기는 게 아님을 소심하게 확인하니 마음이 좀 놓인다.
혼술은 코로나바이러스가 낳은 라이프스타일의 한 단면이다. 기왕이면 더 즐겁고 우아하게 디자인해야 하지 않겠는가. 가족이 먹다 남긴 과일 조각이나 과자 부스러기가 안주의 전부라 하더라도 가장 단정한 그릇에 행과 열을 맞춰 담아보자. 백색 형광등을 끄고 안온한 느낌을 주는 작은 조명을 옆에 옮겨 놓자. 술집 분위기를 청각적으로 연출해주는 인터넷 사이트도 도움이 되는데, 얼마 전 체험해본 ‘단골집이 그리워’(imissmybar.com)는 꽤 그럴듯했다. 바텐더가 병을 따고 술을 따르는 소리,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웃는 소리,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 창 너머 길거리의 소음, 그리고 ‘스포티파이’의 플레이리스트에서 고른 음악까지 한번에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편하고 자유로운들 집에서 혼자 마시는 술을, 봄바람 가르며 노을 내리는 도시를 달린 뒤 ‘그리운 단골집’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마시는 술에 비할 수 있겠는가. 혼술의 전성시대가 빨리 저물기를 기원하며,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