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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열쩡! 열쩡! 열쩡!”은 아재들끼리만

등록 2021-03-17 17:45수정 2021-03-18 02:37

50대 후반 남성 넷의 ‘꼰대 상황극’을 테마로 하는 ‘한사랑산악회’의 소개 화면. 유튜브 갈무리.
50대 후반 남성 넷의 ‘꼰대 상황극’을 테마로 하는 ‘한사랑산악회’의 소개 화면. 유튜브 갈무리.

김은형 | 논설위원

얼마 전 엄청난 중년 콘텐츠를 알게 됐다. 유튜브에서 난리 난 ‘피식대학’ 채널의 ‘한사랑산악회’다. ‘한사랑산악회’는 50대 후반의 남성 넷이 산에 오르면서 벌어지는 일종의 상황극이다. 진한 경상도 사투리로 늘 “열쩡(열정)! 열쩡! 열쩡!”을 외치는 김영남 회장과 산악회장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영등포상가번영회 회장(인 줄 알았으나 부회장으로 밝혀지는) 이택조, 미국 교포 출신으로 교회 주차 봉사에 열심인 엘피(LP)바 사장 배용길, 수업 중에는 수면가스를 살포하지만 주식거래를 할 때만큼은 전광석화처럼 빛나는 물리 교사 정광용이 그들이다.

대단한 사건도 없이 아는 척 잘난 척을 하거나, 실없는 권력 싸움을 하며 중년의 ‘티키타카’를 이어갈 뿐인 콘텐츠인데도 에피소드마다 댓글이 천여개씩 붙는다. 주로 이런 내용이다. “목소리 크고 맨날 남의 말 끊는 게, 우리 아빠랑 똑같애서 킹받네(열받네)” “고등학교 때 제물포(쟤 때문에 물리 포기했어)라는 별명의 물리 선생님하고 숨소리까지 똑같다” “이모부가 왜 거기 계세요?” 북한산에서도, 인왕산에서도, 설악산 계곡 백숙집에서도 만날 수 있는 ‘흔한’ 아저씨들의 완벽한 재현에 열광하는 것이다.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든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대놓고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집단이 50·60대 중년 남성 아니었나? 목소리 크고, 무례하고, 독선적이고, 가르치려 들고, 단점 말고는 찾기 힘들다는 그 문제의 집단을 사람들은 ‘꼰대’라고 부른다. ‘한사랑산악회’에서도 엘피바에서 알바로 일하는 가수 지망생에게 ‘열정’이 없다며 군기 잡고, 밑도 끝도 없이 조용필 같은 음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학에는 꼭 가야 한다고 강요하는 전형적인 꼰대 아재들의 모습이 묘사된다. 그런데도 댓글들은 훈훈하다. 짜증 나면서도 생각하면 짠해지는 아버지나, 학창시절 무능하지만 선량했던 선생님을 떠올리며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쏟아낸다. 산에서 마주치는 아저씨들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반응도 있다.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갈수록 세대 갈등이 극심해지며 공존이 불가능해 보이기조차 하는 요즘, 유일하게 존재하는 세대 통합의 장이 이곳이 아닐까 싶다.

같이 나이 들어가는 처지임에도 중년 ‘남성’들과는 확실히 선 긋는 태세를 1초도 늦추지 않는 나 자신도 마찬가지다. 왜 나는 알고 싶지도 않은 중년 남성의 시답잖은 일상을 재현하는 이 콘텐츠를 <무한도전> 보던 심정으로 기다리는 것일까. 과몰입 상태인 나는 영남 회장이나 택조 아재가 화면 밖에서는 어떨까 상상해보기도 한다. 지하철에서도 큰소리로 쩌렁쩌렁 이야기할까, 산에서 지나가는 여자 등산객들에게 껄떡거리는 건 아닐까. 드물게 알바생이나 자식들이 등장하지만 카메라는 영리하게도 화면 안에 넷만 담는다. 치고받는 것도, 진상짓도 네명 안에서만 벌어진다.

좀 더 생각해보면 이런 형식 자체가 중년을 향한 강력한 메시지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콘텐츠를 기획하고 연기하는 이들은 30대 초중반의 개그맨이다. 이처럼 ‘극사실적’인 묘사는 한 발짝 떨어져 있어야 가능하지, 당사자들은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객관적인 묘사 역시 창작자의 의식에서 필터링될 수밖에 없는데, ‘한사랑산악회’에 등장하는 중년들은 꼰대스럽긴 해도 밉지 않다. 풀어 말하면 젊은 세대에게 50·60대는 열받고 짜증 나기도 하지만 따뜻하게 바라볼 구석도 꽤 많은 꼰대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단 여기에는 중요한 조건이 하나 있다. 꼰대의 자유의지는 프레임 안에서만 통용될 수 있다. 프레임을 벗어나 영남 회장이 지하철 안에서 열정의 중요성을 큰소리로 강변하거나, 택조 아재가 낯선 등산객의 옷차림이나 태도에 관해 훈계하는 순간 웃어넘길 수 있던 막무가내가 견딜 수 없는 행동으로 바뀌어버릴 것이다.

그러니까 ‘한사랑산악회’는 중년이 지켜야 할 ‘선’에 대한 일종의 매뉴얼일 수 있다. 네 주인공은 시끄럽고, 출처 불명의 금언을 남발하고, 때로 치사하기도 하지만 남을 불쾌하게 할 정도로 선을 넘지는 않는다. 이건 크리에이터들이 그리고 열광하는 젊은 구독자들이 윗세대를 기꺼이 이해하면서도 그들에게 바라는 어떤 선이기도 하다.

시청자 중 20대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하는데, 등장인물들과 비슷한 연령대의 시청자들이 자기객관화의 훌륭한 교재가 될 수 있는 이 콘텐츠를 챙겨 봤으면 한다. 내세울 거 없는 소시민 꼰대들의 주책이기 때문에 배울 만큼 배우고 교양 있는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는가? 그렇다면 이미 선을 넘었을 가능성이 높다. 생각을 고쳐볼 마음이 없다면 외로운 노후를 미리미리 준비해두는 게 좋을 듯하다.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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