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레카
지난해 허리케인 카트리나 재난 이후 미국에선 정치적 책임 공방이 뜨거웠다. 민주당은 카트리나가 드러낸 흑백간 빈부격차 등을 거론하며 ‘작은 정부’의 실패를 집중적으로 성토했다. 공화당은 무기력한 재난 대처 시스템은 ‘큰 정부’의 비효율 때문이라고 역공했다. 대책도 사뭇 달랐다. 공화당은 피해 기업의 세금감면을 강조했지만, 민주당은 빈곤층 주택건설 지원 계획을 지지했다. 어쨌든 조지 부시 행정부는 1800년대 초 프랑스한테 루이지애나를 사들이면서 치른 금액보다 많은(물가상승률을 고려해도 그렇다) 연방 예산을 쏟아부어야 했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큰 정부’와 ‘작은 정부’는 국가(정부)의 경제주체에 대한 개입 정도와 그 관계로 갈린다. 단순화하면, 재정정책이 국민소득 변화에 큰 효과가 있다는 쪽과 세금을 많이 거두면 소비와 투자가 오히려 감소한다는 쪽의 치열한 논쟁의 역사였다.
1930년대 대공황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애덤 스미스)에 내포된 ‘합리적 선택의 모순’(존 케인스)을 드러냈다. ‘시장의 실패’는 정부의 적극적 개입으로 보완됐다. 그러나 70년대에 닥친 스태그플레이션(고물가 저성장)은 ‘정부의 실패’(밀턴 프리드먼)로 규정됐고, 세계는 다시 ‘작은 정부, 큰 시장’(신자유주의)을 주류로 받아들였다. 이런 역사를 들어 혹자는 순환설을 거론하기도 한다. 1930년대 큰 정부가 40여년이 지난 70년대에 작은 정부로 이행했으니, 다시 한번 새로운 질서를 모색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요즘 우리 정가에서도 ‘세금만 거두려는 큰 정부’란 비판과 ‘할 일을 다하지 못한 작은 정부’라는 공박이 한창이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누구한테 얼마나 세금을 거둬 어디에 쓸 것이냐’는 문제는 다름 아닌 ‘국가 정체성’의 문제다. 활발하고 치열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이유다. 물론 가당찮은 색깔론만 피한다면 말이다.
김회승 논설위원 hon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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