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건 l 소설가·영화감독
얼마 전 관람한 픽사 애니메이션 <소울>에는 태어나기 전 영혼들의 세계가 나온다. 영혼들이 여러 방에 들어가 다양한 체험을 하고 다른 성격과 취향을 형성한다는 설정이 흥미로웠다. 이런 설정이라면 같은 환경에서 자란 쌍둥이인데도 성격이 다른 이유가 설명이 된다. 유전자만의 이유도, 환경적인 이유만도 아닌 것이다.
사람의 다채로운 성격은 늘 흥미로운 주제이다. 나도 유행하는 엠비티아이(MBTI) 테스트를 해봤다. 테스트 결과인 INTJ에 대해 묘사된 성격이 어느 정도 나와 비슷하다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러한 검사를 그다지 신뢰하지는 않아도 외향이니 내향이니 하는 성격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태어날 때부터, 혹은 기억도 나지 않는 유아기에 너무 많은 게 결정되어버린다는 이론에는 마음이 가지 않는다. 과연 성격은 타고나는 것이고 변할 수 없는 것일까. 사회적인 성격은 성장기에 겪는 경험들이 큰 영향을 미치고 나이가 들면서 점점 굳어지는 것 같다.
왕따를 당한 경험이 없더라도 학창 시절에 조금의 상처 없이 원만하게만 성장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에는 내 가슴에 특별히 박힌 장면이 있다. 초등학생인 선이가 같은 반 보라의 생일 파티에 찾아가 현관 앞에서 벨을 누르는데 모르는 사람이 나온다. 보라가 엉뚱한 주소를 알려줬고 선은 초대받지 못한 것이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며 선이 마음을 다치고 앞으로 어떻게 될까 조마조마했다.
초등학생이던 시절 내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당시 자주 놀던 우찬이가 전화를 받지 않아 우찬이네 집에 가서 문을 두드렸는데 반응이 없었고 나는 계속 초인종을 눌렀다. 한참 뒤에 우찬이네 엄마가 문을 열고 나와서 “우찬이 없는데”라고 하셨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우찬이는 다른 친구인 하늘이와 놀고 있었다. “나 없다고 해”라고 엄마에게 시켰을 우찬이, 그것도 모르고 초인종을 계속 누르고 있었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린 나이에도 수치심이 너무 커서 우찬이에게 왜 그랬는지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 경험 이후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쭉 마음을 닫고 지낸 것 같다. 주변 사람들과 쉽게 속 얘기도 하고 가까워졌으나 관계를 유지할 줄 몰랐다. 반이 바뀌면, 학교를 졸업하면 전부 소원해졌다. 내 성격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인가 고민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내가 좀처럼 먼저 누군가에게 연락하지 않는 사람이 된 거였다. 누군가 그립고 생각이 나도 우찬이네 현관문 앞에 서 있던 어린아이가 버티고 있었다. 나는 이 기억을 서른이 넘어 심리 상담 시간에 꺼냈는데 그런 깨달음을 얻는다고 해서 문제가 바로 해결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사람들과 멀어지고 외로움과 부끄러움을 안고 있었으면서도 ‘나는 원래 혼자가 어울리는 성격이야’라며 굳어져 갔다. 이대로는 먼저 다가가는 것도 연락하는 것도 안 쓰는 근육처럼 점점 더 굳어지고 퇴화될 거란 것을 느꼈다. 친해지고 싶은 사람에게 용건이 없어도 인사하기, 고마운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 제대로 표현하기. 여전히 잘 해내지는 못하지만 서른넷부터는 의식하며 재활하는 기분으로 노력하고 있다.
“너답지 않게 왜 그래.” “나다운 게 뭔데?” 하는 대사는 손꼽히게 오글거리는 클리셰이지만, 정말 중요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어떤 게 타고난 기질이고 어디까지 노력해서 세상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하는가는 평생의 숙제일 거다. 영화 <청춘 스케치>에서 나온 “스물세살에 되어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이야”라는 유명한 대사를 다시금 곱씹어본다. 스물셋이 아니라 서른셋에도, 어쩌면 마흔셋에도 유효한 대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