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3일(현지시각) 베네수엘라 바르키시메토 외곽에 있는 파비아 쓰레기 처리장에 들어가는 쓰레기 트럭 뒤에서 청소년들이 되팔만한 물건이 있는지 찾고 있다. 연간 세계 식량의 14%가 소비되지 못하고 버려진다고 UN세계식량농업기구는 밝혔지만, 오늘날 베네수엘라에서는 극심하게 오른 물가로 인해 사람들이 버리는 것을 주저할 정도다. AP연합뉴스
김순배 | 칠레센트랄대학교 비교한국학연구소장
집 근처에 베네수엘라 대사관이 있다. 그 앞에 선 민원인들의 줄은 해마다 더 길어져, 100m를 훌쩍 넘을 때도 있다. 2013년 우고 차베스 대통령 사망 이후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위기가 갈수록 심해지면서, 칠레로 새 삶터를 찾아온 이민자가 크게 늘어난 탓이다.
국제기구 등에 따르면, 2014년 이후 베네수엘라 국민 약 500만명이 이민을 떠났다. 이제 칠레에서도 베네수엘라 이민자는 접경국인 페루 출신보다도 많아져, 출신국 기준으로 최대 이민자를 차지했다. 지난해 3월 발표된 칠레 통계청 자료를 보면, 베네수엘라 이민자는 전년 대비 57.6%가 늘어난, 45만5천여명으로 전체 이민자의 30.5%를 차지한다. 그다음 출신국별로 페루(15.8%), 아이티(12.5%), 콜롬비아(10.8%) 순서다.
그래서 베네수엘라 이민자와 만나는 게 낯설지 않다. 며칠 전 인터넷 통신사를 바꿨는데, 아파트 입구에서 영업하던 새 통신사 판매원도, 바꾸지 말라던 기존 통신사 상담원도, 인터넷 설치 기사도 억양이 같아서 새삼 놀랐다. 조금 빠르고 통통 튀는 듯한 베네수엘라식 스페인어를 썼다.
산티아고 도심의 인도는 이민자 노점상들이 좌판을 펼쳐 놔, 지나가기 힘들다. 이민자가 몰려 사는 시내의 골목에는 그들의 상권이 형성돼, 베네수엘라식 햄버거 아레파 등이 팔려 나간다. 한 칠레인 동료가 “시내에 나가면 마치 베네수엘라 땅 같다. 나도 낯설다”고 할 정도다.
칠레 정부가 베네수엘라의 정치혼란을 고려해 거주 자격을 주는 ‘민주적 책임’ 비자를 도입했지만, 신청자 약 절반이 해당 비자를 받지 못했다. 지난 1월 칠레 일간지에 보도된 통계를 보면, 2020년 1~11월 1만3656명이 밀입국자로 조사됐다. 그 가운데 약 75%인 1만213명이 베네수엘라 출신이다.
베네수엘라 이민자 문제는 국경이 맞닿은 콜롬비아에선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다. 170만여명에 이르는데, 그 가운데 약 100만명이 불법 이민자다. 이반 두케 콜롬비아 대통령이 지난 1월 이들의 체류를 일시적으로 합법화하는 정책을 내놨다가 국민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코로나 위기로 경제가 더 어려워지면서, 주변국에서의 반감은 더 커지고 있다. 지난해 9월 갤럽이 발표한 이민자 수용성 지수는 페루, 에콰도르, 콜롬비아 등 베네수엘라 이민자가 크게 늘어난 나라에서 특히 더 떨어졌다. 칠레 이민 당국자는 이민자 증가로 공사장 인부의 임금이 7% 낮아졌다며 이에 따른 반감을 지적했다. 베네수엘라 이민자 등이 공터에 텐트를 치자, 주민들이 치안이 불안하다고 시위를 해서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다. 베네수엘라의 위기와 대규모 역내 이민이 인도주의적 차원의 문제뿐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 사회적 갈등을 낳는 것이다.
고국에서 떠밀려 나온 삶은 고단하다. 지난해 12월, 이웃나라 트리니다드토바고로 가던 베네수엘라 배가 침몰해 이민자 20여명이 숨졌다. 칠레의 페루 이민자들은 오랜 이민의 역사 속에서 이제 꽤 큰 식당도 운영한다. 반면, 베네수엘라 출신의 대규모 칠레 이민은 오래지 않아서, 통신판매원처럼 저임금 노동시장을 채워 나간다. 다른 주변국 이민자에 비해서 의사 등 전문직 이민자도 상대적으로 많지만 소수다.
차베스 대통령 사망 직후 베네수엘라를 방문했을 때, 친차베스와 반차베스로 둘로 나라가 완전히 쪼개져 있었다. 이제는 밀가루조차 구하기 어려운 나라가 됐고, 국민들은 주변국을 떠돈다. 2년 전 칠레로 이민을 왔다는 통신사 판매원 드로산니는 “집은 안 팔았어요. 돌아갈 테니까. 지금 상황은 잠시 지나가는 거니까…”라고 말했다. 그의 바람이 오래지 않아 이뤄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