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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개미 주머니 터는 국민연금? / 김수헌

등록 2021-03-07 20:02수정 2021-03-08 02:38

김수헌 ㅣ 경제팀장

석 달째 소낙비 퍼붓듯 이어지는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매도 폭탄에 개인투자자들의 심기가 영 불편한 모양이다. 지난 연말·연초 급등장에 앞뒤 안 가리고 올라탄 개인투자자들은 최근 주가 하락 국면을 겪으면서 국민연금의 ‘변심’에 배신감을 토로한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엔 “주가지수 하락 주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해체”, “연기금의 국내 주식 보유 비율을 높여 개미들의 눈물을 닦아달라”와 같은 제목의 글이 쏙쏙 올라온다.

급기야 개인투자자 권익보호단체를 표방하는 한국주식투자자연합회(한투연)가 지난 4일 전북혁신도시에 있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앞에서 규탄 시위까지 했다. “국민을 주식 투매의 총알받이로 이용하는 국민연금”, “개인투자자에 대한 명백한 이적행위”…. 집회 현장에선 국민연금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이 쏟아졌다. 이들에게 국민연금은 ‘외세’(외국인 대량 매도)에 맞서 국내 주식시장을 지켜낸 ‘동학개미’의 등에 총질하는 ‘관군’이다.

실제 국민연금이 국내 주식을 많이 팔긴 했다. 지난해 12월24일부터 이달 5일까지 46거래일 내리 순매도, 역대 최장 기록이다. 이 기간 순매도 규모는 거의 14조원에 달한다. 국민연금은 왜 국내 주식을 계속 파는 걸까. 개인투자자들의 비난은 타당한 것인가.

답을 얻으려면 국민연금의 자산배분 원칙을 이해해야 한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국내외 주식과 채권, 부동산 등 다양한 자산별 연간 목표 비중을 정해놓고 투자한다. 특정 자산 가격이 크게 변동해 애초 계획했던 비중에서 벗어날 경우 이 자산을 추가로 사거나 팔아서 비중을 맞춘다. 이를 리밸런싱이라고 한다. 800조원이 넘는 거대 자금을 운용하는 국민연금으로선 수익률 관리를 위해 당연히 견지해야 할 투자 전략이자 원칙이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5월 발표한 중기 자산배분계획에서 국외 주식 비중을 늘리는 대신 국내 주식 비중을 2025년까지 15% 안팎으로 줄이겠다고 했다. 올해 말 국내 주식 비중은 16.8%로 잡았다. 국민연금이 국내 대신 국외 주식 비중을 꾸준히 확대하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다. 국내 주식을 잔뜩 짊어진 채 본격적인 연금 지급 시기를 맞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주식시장 충격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내보다 국외 주식 투자의 수익률이 더 높았던 사정도 있다.

최근 매도 논란은 지난해 11월부터 코스피가 급등하면서 큰 규모의 리밸런싱 수요가 발생한 탓이다. 작년 말 기준 국민연금이 보유한 국내 주식 가치가 176조6960억원으로 크게 늘어나면서 전체 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1.2%까지 치솟았다. 올해 말 목표 비중보다 4.4%포인트나 높은 ‘비정상’ 상황이 됐으니 서둘러 국내 주식 매도에 나설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코스피가 3000선을 유지할 경우 국민연금이 목표치를 맞추기 위해 앞으로도 20조원 이상 국내 주식을 더 팔아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하락장에서 손실을 보고 있는 개인투자자의 당혹스러움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자산배분 원칙에 따라 포트폴리오를 조정하는 국민연금을 악마화하고, 과도한 비난을 퍼붓는 게 정당화될 수는 없다고 본다. 정부·여당을 압박해 주식 양도차익 과세 확대 시행 유예, 공매도 금지 연장을 잇따라 관철한 개인투자자들이 이젠 국민연금의 자산 운용에까지 집단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것 아닌가.

물론 국민연금의 자산배분 목표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기준은 아니다. 그래서 자산별 목표 비중에서 ±5%포인트까지 허용 범위를 두고 있긴 하다. 다만 이에 따른 비중 조정은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투자 전략 차원에서 이뤄져야지, 개인투자자의 여론몰이나 정부·여당의 정무적 판단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국민연금은 개인투자자의 계좌 수익률을 떠받치는 기관이 아니다. 전 국민 노후자금의 안정적 관리가 국민연금의 유일한 존재 이유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때다.

minerv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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