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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나는 너의 시인 / 홍인혜

등록 2021-03-05 15:57수정 2021-03-06 16:07

홍인혜|시인

친구가 집을 구하고 있다. 전염병으로 뒤숭숭한 시절이지만 이사가 시급해 조심스레 부동산 투어를 하고 있다. 몇개의 전세 매물을 둘러본 친구는 그중 한 집에 마음이 기울었는데 홀로 결정하기 힘들다며 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함께 집을 봐달라는 거였다. 나는 깐깐한 눈을 탑재하고 친구와 함께 신영동의 한 집으로 향했다.

그 집은 산자락에 단단하게 버티고 선 빌라였다. 창이 많아 볕 인심이 후한 집이었다. 현재 살고 계신 집주인분이 “이 창에선 일출이 저 창에선 석양이 보여요” 하고 자랑스레 말씀하셨다. 그분이 집 앞에서 딴 앵두로 담갔다는 술을 권하며 봄이 오고 날이 풀리면 거실에서 백사실 계곡 물소리까지 들릴 거라고 하셨을 때 실은 우리 둘 다 볼이 앵두처럼 달아오르고 눈동자에 하트가 뜨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조언자로 참석한 몸,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엄격함을 장착했다. 수압도 체크하고 보일러 연식도 따져보는 등 나름의 책무를 다하려 애썼다. 그러다 집 곳곳에 방대한 양의 책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내가 쌓인 책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집주인분이 말했다. “책이 참 많죠? 제가 번역 일을 해서….” 그러자 나의 친구가 반갑다는 듯 경쾌하게 답했다. “어머나! 이 친구는 시인이에요!”

사실 나는 낯선 이에게 자신을 시인이라 소개하는 일이 드물다. 본래 카피라이팅과 만화 일 등 다양한 일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시인’으로 나를 칭하는 것이 못내 쑥스럽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여러 미디어에서 시인이라는 인간군을 어딘가 달떠 있거나 모종의 광기를 띤 캐릭터로 묘사하곤 하는지라 이 칭호가 더욱 머쓱해졌다. 내가 세 들 집은 아니지만, 혹 수상쩍은 사람으로 비치진 않을까 노파심에 시동을 거는데 집주인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말했다. “시인이라니, 너무 부럽다!”

이 순수한 경탄에 문득 몇년 전의 여행이 떠올랐다. 당시 문예지 공모전에서 신인상을 거머쥐고 마침내 등단이라는 것을 한 나는 앞서 언급한 친구와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 출발하기 전 친구는 나에게 ‘뽀에떼싸’라는 단어를 외워 두라고 했다. 포에테사(poetessa)는 이탈리아어로 시인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과연 그 말을 쓸 일이 있겠냐며 웃었다. 우리는 나폴리의 오래된 집에서 묵었다. ‘이런 문화유산을 빌려도 되는 거야?’ 싶은 대저택이었다. 집주인은 박물관 같은 집 안을 돌며 1800년대의 가구와 선조들의 초상화를 우리에게 소개했다.

황홀한 시간들을 보내고 떠나는 날이 찾아왔다. 열쇠를 받으러 오는 집주인을 기다리며 나는 만들어진 지 100년, 조율한 지 50년은 너끈히 흘렀을 낡은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집주인은 어느새 나타나 내 연주를 듣고 있었다. 은회색 백발이 근사했던 초로의 이탈리아 남자는 연주를 끝낸 나에게 물었다. “유, 아티스트?” 나는 수줍게 말했다. “뽀에떼싸” 그러자 그가 경탄하는 표정으로 영화 속 중세 귀족처럼 한쪽 무릎을 굽히며 정중히 두 손으로 악수를 청했다.

시인이 뭐라고 이런 근사한 인사를 받으며, 낯선 이에게 부럽다는 소리까지 듣는 걸까. 물론 내 마음 한구석엔 도도한 시인의 혼이 있어서 시가 가장 위대하다는 생각을 하곤 하지만, 사실 내가 그 위대함의 부스러기라도 감당하기엔 너무 시시한 존재라는 생각을 더 많이 한다. 그래서 스스로를 시인이라 칭하는 데 이토록 주저하는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 시인 됨을 자랑스러워해주고 어딜 가나 ‘내 친구는 시인!’이라고 말해주는 벗이 있다는 점 하나는 당당하게 자랑스러운 일이 맞는 것 같다. 그 마음이 귀해 더 열심히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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