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석 ㅣ 문화비평가
때론 하나의 질문, 혹은 하나의 ‘짤’이 삶 전체를 돌아보게 만든다. 지금 나는 어떤 아이가 성난 오리를 피해 도망가는 사진을 보고 있는데, 아이에겐 ‘행복하고 건강한 사람들’, 오리에겐 ‘질문거리를 든 철학자’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젊은 철학도였던 시절, 나는 딱 저 오리였다. 멀쩡하고 평온해 보이는 친구들만 보면 이상한 질문을 던져 괴롭히곤 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오리들이 색다른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것 같다. 이름하여 ‘밸런스 게임’이다.
꿈틀이 맛 지렁이 대 지렁이 맛 꿈틀이. 평생 머리 안 감기 대 평생 이빨 안 닦기. 팔만대장경 다 읽기 대 대장내시경 팔만번 하기. 둘 중 하나를 꼭 택해야 한다면 당신은 어느 쪽을 고를 건가? 사람들은 당혹해하면서도 키득거리며 답을 말한다. 어느 쪽도 선택하기 곤란하게 균형을 맞춰야 재미있다고 ‘밸런스 게임’인가 보다. 영어권에서는 ‘우드 유 래더(Would you rather) 게임’이라며 2010년대 초반에 유행했고 이를 소재로 한 호러 영화도 만들어졌는데, 최근 케이팝 스타들이 즐기면서 한국산 질문들로 새로운 유행을 타고 있다.
그전에는 ‘이거냐 저거냐(This or That) 게임’이라는 더 짧은 질문이 유행했다. 짜장면 대 짬뽕. 도시 대 시골. 힙합 대 발라드. 이런 형태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대에게 던지기 좋은 질문이다. 서로의 취향을 알아내 나와 맞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밸런스 게임은 다르다. 오히려 오래 알고 지낸 사람,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기 좋다. 또한 나 자신도 모르는 나를 파헤쳐보게 한다.
토 맛 토마토 대 토마토 맛 토. 어쩌면 이 질문이 밸런스 게임의 정수가 아닐까 싶다. 절묘한 라임과 시적 운율이 깃들어 있는 이 질문은, 시옷 하나의 위치를 바꾸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뒤집는다. 토마토 혹은 토라는 형식이 중요한가, 맛이라는 내용이 중요한가? 똥 안 먹었는데 똥 먹었다고 뉴스에 나오기 대 아무도 모르는데 똥 먹기. 이 질문은 우리에게 사회적 평판이 중요한가, 자신의 도덕적 위생적 원칙을 지키는 게 중요한가를 묻는다.
밸런스 게임의 인기 질문들엔 어떤 특징이 있다. ‘좋은 것들 중에 더 나은 것’을 겨루는 질문도 없지 않지만, ‘나쁜 것들 중에 덜 나쁜 것’을 겨루는 질문이 훨씬 많고 또 재미있다. 평생 두통 대 평생 치통. 평생 피자 테두리만 먹기 대 평생 치킨 목만 먹기. 가장 좋아하는 음식에 알레르기 생기기 대 가장 싫어하는 음식 일주일에 한번씩 먹기.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반응을 뱉어낸다. “아, 최악이다.” “그런데 이거 꼭 선택해야 돼요?” “이게 뭐라고 이렇게 진지하게?” 우리는 왜 상상도 하기 싫은 상황을 두고 고민하고, 그러면서 또 재미있다고 키득대고 있나? 이 자체가 거대한 난센스 유머다.
세상에는 진짜 무시무시한 맹수들, 우리가 반드시 그 선택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회적 밸런스 게임’이 있다. 방역 대 경제, 나만 빨리 갈래 대 장애인과 같이 갈래, 오늘 편하게 비닐 쓸래 대 10년 뒤에 열대야로 안 죽을래. 그에 비해 밸런스 게임이라는 오리는 꽥꽥 시끄럽긴 해도 실질적인 위험은 없다. 하루 종일 선택하고 결정하는 업무에 시달리면 저녁엔 메뉴 하나 고르는 일조차 피곤하다. 그러나 밸런스 게임을 하고 나면 머리가 상쾌해지고 해방감까지 느낀다. 이제는 토마토 맛 토마토를 먹고 팔만대장경을 안 읽고 이빨을 닦고 누워도 된다. 그리고 유튜브를 켜고선 나 다음으로 이 오리에게 쫓기는 사람을 보며 낄낄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