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민
자유기고가
‘가지 말까?’ 지난 6일 혼자 지하철을 타고 일산(경기 고양시)에서 인덕원(경기 안양시)까지 가는 내내 갈팡질팡했다. ‘혼자 온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 나는 비관적인 방관자다. 불행해도 편하다. 이미 실망 상태라 실망할 일이 없다. 평생 방관만 하다 보니 이날 같이 가자고 꾈 사람이 없었다. 혼자라 더 움츠러들었다.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복직을 응원하는 ‘희망뚜벅이’에 참여하러 가는 길이었다.
‘도망갈까?’ 손소독을 하고 열을 잰 뒤 50명씩 나눠 걸었다. 200명은 넘어 보였다. “왔어!” 아는 얼굴들끼리 손짓했다. 중년 여자 넷은 사탕을 나눠 먹다 나한테도 하나 줬다. 어색했지만 일단 걸어보기로 했다. ‘발톱 깎고 올걸.’ 걷다 보니 새끼발가락이 아파서 외롭지 않았다. 혼자 온 사람들이 더 있었다. 내 앞에 걷는 여자 귀에 소주 모양 귀걸이가 달랑거렸다. 30대로 보이는 커플은 걸으며 싸웠다. “왜 자꾸 말을 끊어?” “너는 왜 남의 말을 안 들어?” ‘저러다 한명 가지’ 했는데 한 30분 지나 보니 둘이 팔짱 끼고 있다.
한 시간 넘게 걷다 보면 ‘증상’이 나타난다. 뜬금없는 얘기를 하거나 노래 하나에 꽂혀 흥얼거리게 된다. 내 뒤에 걷던 세 청년에게도 그 증상이 나타나는 거 같았다. 대화에 맥락이 없다. 서울랜드를 지나는데 한명이 말했다. “어릴 때 서울랜드에서 길 잃어버렸어.” 다른 친구가 답했다. “대학생 때 거기 가봤어. 코끼리 보러.” 그러다 그냥 걸었다. 길가에 선 한 남자와 아이가 ‘김진숙 복직’ 펼침막을 들고 손을 흔들어 줬다.
초고층 아파트단지들이 나왔다. ‘서밋’(Summit·정상), ‘위버필드’(Ueberfield)… ‘위버필드’는 대체 무슨 뜻일까? ‘위’(위버·ueber)를 뜻하는 독일어 낱말에, 영어 ‘들판’(필드·field)을 합친 ‘상층부’ 같은 뜻의 조어일까? 수직으로 솟은 단지 옆으로 사람들이 수평으로 걸었다.
두 시간쯤 지나 자원봉사자들이 점심을 나눠줬다. 김이 오르는 가래떡이랑 두유를 받아 벤치에 혼자 앉았다. 내 옆에 앉은 커플은 귤을 서로 먹여줬다. 아무도 내게 말 걸지 않았고 나도 아무에게도 말할 필요 없었다. 가래떡이 맛있다. 외롭지 않았다.
서울부터는 9명씩만 함께 걸을 수 있었다. 경찰이 앞뒤로 섰다. 거리를 둬야 해서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발가락이 아프고 기다리는 시간이 짜증 났다. 뒤처진 김에 건널목에서 튀려 했는데 뒤에 섰던 경찰이 빨리 오란다.
10㎞를 4시간 걷다 도망갔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니 미세먼지가 심했다. 나는 보통 일어나자마자 성질이 난다. 억울한 기억도 떠오르고, 먹고살 일을 생각하면 답답해진다. 이날 아침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오늘 걷는 사람들 힘들겠다.’
방관자인 나는 나를 위해 걸었다(결국 도망갔다). 18살 김진숙이 천장에 구멍을 뚫어 만든 다락에 갇혀 미싱을 돌릴 때, 18살 나는 대학에 갈 생각뿐이었다. 21살 용접공 김진숙이 쥐똥이 섞인 밥을 공업용수에 말아 먹을 때, 21살인 나는 학점을 땄다. 어용노조에 맞서다 대공분실에서 고문당하고 해고된 김진숙이 36년간 복직 투쟁을 벌일 때, 나는 ‘서밋’ 같은 데 살아야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있다 생각했다. 40대가 된 나는 여전히 불안하다. 그리고 이제야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부당해고를 당한 김진숙이 복직되지 못하면, 그런 상식적인 일조차 일어날 수 없는 사회라면,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불안할 거다. 그의 복직을 바라는 마음 말고는 공통점 없는 사람들이랑 가래떡을 먹는 순간 같은 게 없다면, 인생은 의미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