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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글을 쓴다는 것은 어둠을 향한 돌팔매

등록 2021-02-01 09:15수정 2021-02-01 09:32

[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 시간의 극장
제31화 역대 칼럼니스트 2편

“그는 내가 1년 전 도쿄에 들렀을 때 숙소까지 안내해 준 재일동포 대학원생이었다. 한국 생활이 어땠느냐고 묻자 그는 ‘제가 한국인이랑 똑같지 않아 너무 슬펐어요’라고 말했다.” 2006년 4월, 한정숙의 ‘세상읽기’ 칼럼이다.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표현할 길 없는 감정이 치밀었다. 미안함이었을까? 안타까움 혹은 슬픔이었을까?” 지난 33년 동안 <한겨레>에 실린, 마음을 흔드는 칼럼을 두번째로 추려 보았다. 해설 김태권

“눈보라에서 혼자 아늑해도 될까?”
서경식의 글에 병역거부로
수감 중인 어떤 젊은이가 답했다

용산참사 때 황현산은 썼다
“우리가 용산참사를 잊는다면
다들 부끄러움을 모르게 될 것”

역사학자 한정숙의 글은 조곤조곤 이치를 따지면서도 마음을 울리는 힘이 있다. 배경의 인물은 프랑스의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다. 나치에 맞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총살당했다. 2014년 6월에 블로크 사망 70주년을 맞아 한정숙은 조촐한 행사에 참석했다.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논란을 볼 때마다 블로크라면 어땠을까 생각을 하게 된다.” 김봉규 기자가 찍었으나 지면에 실리지 않았던 사진을 이번에 공개한다.
역사학자 한정숙의 글은 조곤조곤 이치를 따지면서도 마음을 울리는 힘이 있다. 배경의 인물은 프랑스의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다. 나치에 맞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총살당했다. 2014년 6월에 블로크 사망 70주년을 맞아 한정숙은 조촐한 행사에 참석했다.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논란을 볼 때마다 블로크라면 어땠을까 생각을 하게 된다.” 김봉규 기자가 찍었으나 지면에 실리지 않았던 사진을 이번에 공개한다.

“서경식의 글은 섬세하고 유려하며 잔잔하지만 언제나 깊은 곳에서 슬픔을 자아낸다. 그러나 그 묵직한 슬픔에는 … 강력한 힘이 있다.” 2006년 1월, 한승동의 평가다. 한승동은 서경식의 칼럼을 여러 해 동안 번역했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서경식은 일본어로 글을 쓰기 때문이다.

2006년 4월의 칼럼을 읽으며 나는 울었다. “소학교(초등학교) 시절 어느 재일조선인 아동이 두들겨 맞고 있는 현장을 우연히 목격한 적이 있다. 일본인 악동들이 ‘조센, 조센’이라 욕하면서 때리고 있었다. … 나는 아이가 낼 수 있는 최대의 용기를 발휘해 ‘폭력은 그만둬’ ‘약자에게 해코지하지 마’라고 외치며 말리고 나섰다.” 얼핏 ‘의롭고 용감한 어린이’의 자랑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일은 수습이 됐지만 내게는 꺼림칙한 생각이 남았다. 내게는 기껏 ‘폭력은 그만둬’라는 일반적인 도덕률을 휘두를 용기밖에 없었고 ‘나도 조선인이야’라고 선언할 용기는 없었다. 자신도 두들겨 맞을 각오까지는 할 수 있었지만 굳이 일상적인 차별을 받는 처지까지를 감내할 각오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인 아이는 그 자리를 떠날 때 힐끗 나를 쳐다봤는데 그것은 도와준 데 대해 감사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자신을 때린 일본인을 보는 것과 같은 눈빛이었다. 당연했을 것이다. 그가 보기에 나는 아무리 정의파처럼 처신해도 자신을 처벌하고 때린 또래들의 한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 구절은 가슴이 먹먹하다. “그때부터 나는 ‘일본인’만은 되지 않겠다고 계속 다짐해왔다. 그랬던 내가 드디어 자기 민족의 나라에서 생활을 시작했는데 가는 데마다 ‘외국인입니까?’ ‘일본인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있는 것이다.”

2009년 겨울에는 <한겨레> 지면을 통해 ‘편지’를 주고받았다. 서경식은 11월에 일본에서 눈보라에 휘말렸다가 무사히 돌아온 다음 썼다. “‘거짓말 같아.’ 바로 전까지의 일이 허구고 이 따뜻한 거실이 진실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내가 따뜻한 곳에서 느긋하게 앉아 있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다.” 눈보라 치는 세상에서 나 혼자 아늑해도 될까, 서경식은 묻는다. “나는 항상 지금의 내 생활이 어쩐지 모조품 같고 그 바깥에 위험으로 가득 찬 진실이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칼럼의 제목은 ‘눈보라처럼 진실이 몰아치다’였다.

이 칼럼을 읽고 독자가 편지를 보냈다. “저는 양심적 병역거부로 수감 중인 젊은이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은국이라고 밝혔다. “지금 저는 모조품과 같은 평온하고 안전한 삶을 거부하고 위험으로 가득 찬 ‘바깥’에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럽습니다. … 저에게 이 감옥은 진실의 세계입니다.” 같은 해 12월에 ‘한겨레를 읽고’ 지면에 실렸다. 며칠 후 서경식은 ‘답장’을 썼다. 앞서의 ‘조선인 아이’ 이야기를 다시 꺼내며 부끄러워했다. “나는 … 안전지대에 있었고 그 안전지대에서 뛰쳐나가지도 못한 채 이 나이가 되도록 살아왔다. 그런 내 글에서 은국님이 격려를 받았다는 건 어딘가 잘못돼 있다. 나야말로 그한테서 격려받은 것이며, 그 앞에서 부끄러워해야 한다.”

“죽어가는 아들과 비탄에 빠진 어머니. 정말 비탄에 빠진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 것이다. 그건 자식들의 출옥을 학수고대하다 원통하게 죽어가야 했던 내 어머니의 초상이었다.” 독일의 판화가 케테 콜비츠의 작품 &lt;죽은 아들을 껴안고 있는 어머니&gt;에 대해 2015년 7월에 서경식이 쓴 칼럼이다. “한국과 전세계에는 이런 비탄을 강요당한 어머니들이 얼마나 많을까.” 케테 콜비츠의 작품과 함께 선 서경식의 모습을 한승동 기자가 찍었다.
“죽어가는 아들과 비탄에 빠진 어머니. 정말 비탄에 빠진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 것이다. 그건 자식들의 출옥을 학수고대하다 원통하게 죽어가야 했던 내 어머니의 초상이었다.” 독일의 판화가 케테 콜비츠의 작품 <죽은 아들을 껴안고 있는 어머니>에 대해 2015년 7월에 서경식이 쓴 칼럼이다. “한국과 전세계에는 이런 비탄을 강요당한 어머니들이 얼마나 많을까.” 케테 콜비츠의 작품과 함께 선 서경식의 모습을 한승동 기자가 찍었다.

2009년 11월과 12월에 &lt;한겨레&gt; 지면을 통해, 감옥에 있던 은국은 서경식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서경식은 2008년 3월에 ‘2018년, 내가 만나고픈 이런 조국’이라는 칼럼을 쓴 일이 있다. “이 나라는 징병제와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평화국가로 나아가고 있었다.” 2021년에 이 글을 읽으며 나는 씁쓸하다. 한겨레 데이터베이스에는 은국의 사진이 있다. 2003년 4월,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는 집회에서 피처럼 빨간 물감을 뒤집어쓴 채 퍼포먼스를 벌이는 그의 모습을 류우종 기자가 찍었다.
2009년 11월과 12월에 <한겨레> 지면을 통해, 감옥에 있던 은국은 서경식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서경식은 2008년 3월에 ‘2018년, 내가 만나고픈 이런 조국’이라는 칼럼을 쓴 일이 있다. “이 나라는 징병제와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평화국가로 나아가고 있었다.” 2021년에 이 글을 읽으며 나는 씁쓸하다. 한겨레 데이터베이스에는 은국의 사진이 있다. 2003년 4월,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는 집회에서 피처럼 빨간 물감을 뒤집어쓴 채 퍼포먼스를 벌이는 그의 모습을 류우종 기자가 찍었다.

“1960년대 말에 내 형들이 모국 유학길을 택했을 때 누구보다도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한 것은 아버지였다. 그러나 형들은 조국에서 감옥에 갇혔고 그들이 석방되는 날을 보지도 못한 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서경식은 2006년 3월 칼럼에 썼다. 간첩이 아닌데도 간첩죄를 뒤집어쓰고 서승은 19년을, 서준식은 17년을 감옥에 있었다. “서승은 모진 고문을 견디다 못해 난로의 경유를 뒤집어쓰고 분신자살을 기도했다. 자기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나오는 바람에 발각돼 병원으로 이송됐다.” 2011년 4월 ‘한겨레가 만난 사람’ 지면에 서승의 인터뷰가 실렸다. 촬영은 이정우 기자.
“1960년대 말에 내 형들이 모국 유학길을 택했을 때 누구보다도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한 것은 아버지였다. 그러나 형들은 조국에서 감옥에 갇혔고 그들이 석방되는 날을 보지도 못한 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서경식은 2006년 3월 칼럼에 썼다. 간첩이 아닌데도 간첩죄를 뒤집어쓰고 서승은 19년을, 서준식은 17년을 감옥에 있었다. “서승은 모진 고문을 견디다 못해 난로의 경유를 뒤집어쓰고 분신자살을 기도했다. 자기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나오는 바람에 발각돼 병원으로 이송됐다.” 2011년 4월 ‘한겨레가 만난 사람’ 지면에 서승의 인터뷰가 실렸다. 촬영은 이정우 기자.

와다 하루키는 1970년대와 80년대에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돕던 일본의 지식인이다. &lt;한겨레&gt; 창간 이후에는 여러 해 동안 칼럼도 썼다. 2013년에 이정아 기자가 찍은 사진이다. 그런데 2016년 3월에 서경식과 와다 하루키는 &lt;한겨레&gt; 지면을 통해 격렬한 논쟁을 벌인다. “가해자인 일본인과 피해자인 재일조선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 때문에, 다른 한편 “와다의 현실주의와 서경식의 이상주의” 때문에 두 사람의 입장이 갈린 것 같다고 당시 일본 특파원이던 길윤형은 전한다. “어쩌면 이 논쟁은 1990년대 이후 일본 리버럴 세력 안에서 발생한 가장 뼈아픈 ‘균열’을 상징하는지도 모르겠다.”
와다 하루키는 1970년대와 80년대에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돕던 일본의 지식인이다. <한겨레> 창간 이후에는 여러 해 동안 칼럼도 썼다. 2013년에 이정아 기자가 찍은 사진이다. 그런데 2016년 3월에 서경식과 와다 하루키는 <한겨레> 지면을 통해 격렬한 논쟁을 벌인다. “가해자인 일본인과 피해자인 재일조선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 때문에, 다른 한편 “와다의 현실주의와 서경식의 이상주의” 때문에 두 사람의 입장이 갈린 것 같다고 당시 일본 특파원이던 길윤형은 전한다. “어쩌면 이 논쟁은 1990년대 이후 일본 리버럴 세력 안에서 발생한 가장 뼈아픈 ‘균열’을 상징하는지도 모르겠다.”

2009년 1월에 용산참사가 일어났다. 황현산은 12월에 칼럼을 썼다. “이제 1년이 다 되어가니 혹시라도 잊은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가 용산참사를 잊는다면 “그때부터 사람들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사람이 불타면, 사람이 어이없이 죽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그 사람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만 여길 것이다. 그러고는 내일이라도 자신이 그 사람이 될까봐 저마다 몸서리치며 잠자리에 누울 것이다. 그것을 정의라고, 평화라고 부르는 세상이 올 것이다.” 칼럼의 제목은 ‘그 세상의 이름은 무엇일까’였다.

그해 2월에 김선주는 용산참사를 떠올리며 이렇게 썼다. “글쓰기가 이처럼 힘든 시대는 내 생전에 없었던 것 같다. 평생 글 쓰는 것을 업으로 삼아왔는데도 글쓰기가 몸이 오그라들 정도로 힘이 든다. 몇 년 전에 글이 세상을 한 뼘도 바꾸지 못하는데 글은 왜 쓰는가라는 탄식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새파란 후배가 글이 언제 세상을 바꾼 적이 있나요, 그저 위안을 줄 뿐이지요, 시들하게 답했다. 당시에도 아연했지만 그때의 탄식이 사치로 느껴질 만큼 지금은 글쓰기의 무력함을 절감한다.”

글은 왜 쓰고 왜 읽나. “(시인이 쓰는 글은) 이 모욕 속에서, 이 비루함 속에서 이렇게밖에 살 수 없다고 생각하려던 사람들을 다시 고쳐 생각하게 한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2010년 3월에 썼다. “(글 쓰는 사람의) 용기는 당신이 한순간이라도 꿈꾸었던 세계가 허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로 결심한 사람의 용기다.” 2013년에 김정효 기자가 찍었는데 지면에는 실리지 않았던 사진을 공개한다. 웃음을 터뜨리는 생전의 모습을 보니 격조있던 그의 문장이 새삼 그립다.
글은 왜 쓰고 왜 읽나. “(시인이 쓰는 글은) 이 모욕 속에서, 이 비루함 속에서 이렇게밖에 살 수 없다고 생각하려던 사람들을 다시 고쳐 생각하게 한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2010년 3월에 썼다. “(글 쓰는 사람의) 용기는 당신이 한순간이라도 꿈꾸었던 세계가 허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로 결심한 사람의 용기다.” 2013년에 김정효 기자가 찍었는데 지면에는 실리지 않았던 사진을 공개한다. 웃음을 터뜨리는 생전의 모습을 보니 격조있던 그의 문장이 새삼 그립다.

‘용산참사’를 기록한 2009년 1월21일치 <한겨레> 1면이다. 그해 2월에 김선주는 “글쓰기가 너무나 힘든 시대”라고 괴로워했다. “글이 세상을 한뼘도 바꾸지 못하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사람은 왜 글을 쓰는가. 어쩌면 망각과 싸우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끝까지 잊어버리지 않는 것은 글 쓰는 사람들이다. 사실은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만 글 쓰는 사람이 된다.” 그해 12월에 황현산이 쓴 칼럼이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진영논리에 갇힌 칼럼”이나 “독자를 가르치려 들지만 내용이 뻔한 칼럼”이 &lt;한겨레&gt;에 종종 실려 거부감이 들지만, “김선주 칼럼은 결론을 성급하게 제시하지 않고 자신이 고민하는 결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래서 글 전체를 다 읽게 되는” 좋은 칼럼이라고 했다. 2014년에 한겨레열린편집위원회에서 나온 이야기다. 창간 때부터 &lt;한겨레&gt;와 함께한 김선주의 글은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촬영은 손홍주 기자.
“진영논리에 갇힌 칼럼”이나 “독자를 가르치려 들지만 내용이 뻔한 칼럼”이 <한겨레>에 종종 실려 거부감이 들지만, “김선주 칼럼은 결론을 성급하게 제시하지 않고 자신이 고민하는 결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래서 글 전체를 다 읽게 되는” 좋은 칼럼이라고 했다. 2014년에 한겨레열린편집위원회에서 나온 이야기다. 창간 때부터 <한겨레>와 함께한 김선주의 글은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촬영은 손홍주 기자.

김선주는 외부 필진 출신이 아니다. 언론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해직됐고 한겨레신문 창간에 참여했다. “창간호가 나가자마자 … 찬사와 격려, 비난 등이 전화와 편지를 통해 쏟아져 들어왔다.” 창간 직후인 1988년 5월에 쓴 기사다. 옛날 신문에 익숙하던 “40대 후반의 독자층”은 한겨레가 읽기 불편하다고 했다. 그때까지 “우리나라에 한글 가로짜기로 된 일간신문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조적으로 80살이 넘었다는 한 독자가 ‘나이 먹은 사람이라 읽기가 어렵다. 그러나 파고다공원 근처에서 젊은 사람들이 한겨레신문을 열심히 읽는 것을 보고 참 잘한 일이라고 느꼈다’라는 전화를 주었을 때 한글 가로쓰기는 올바른 선택이었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썼다.

33년이 지났다. 1988년의 젊은 독자가 지금의 40대, 50대다. 2009년에 서경식은 썼다. “글을 쓴다는 것은 빈 병에 편지를 넣어 바다에 띄워 보내는 것과 같은, 또는 어둠을 향해 돌을 던지는 것과 같은 행위다. 누군가에게 과연 가닿을지, 반향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채 그냥 알지 못하는 독자를 향해 말하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2021년의 젊은 사람은 종이 신문을 잘 읽지 않는다고 한다. 오늘날 글은 세상을 바꿀 수 있나.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창간하고 열번째 돌을 맞은 1998년 5월에도 &lt;한겨레&gt;는 역대 칼럼니스트를 소개하는 기사를 실었다. 조영래에 대해 이렇게 썼다. “지난 90년 43살의 한창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 자신이 &lt;전태일 평전&gt;의 지은이라는 사실을 끝내 숨기며 ‘정말 조용히’ 인권과 노동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사진은 돌에 새긴 조영래의 얼굴이다. 정병례 작가가 전각으로 만들어 2000년 9월에 전시했다.
창간하고 열번째 돌을 맞은 1998년 5월에도 <한겨레>는 역대 칼럼니스트를 소개하는 기사를 실었다. 조영래에 대해 이렇게 썼다. “지난 90년 43살의 한창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 자신이 <전태일 평전>의 지은이라는 사실을 끝내 숨기며 ‘정말 조용히’ 인권과 노동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사진은 돌에 새긴 조영래의 얼굴이다. 정병례 작가가 전각으로 만들어 2000년 9월에 전시했다.

“소문대로 그는 원칙에 충실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2012년 11월에 하종강과 인터뷰한 김두식은 썼다. “하종강은 자기 삶을 ‘대단하고 특별할 게 없는데, 그저 남들보다 오래 했을 뿐’이라고 정리했습니다. 자기 자랑을 피하는 대신, 상담과 교육에서 느끼는 보람을 한참 이야기했습니다.” 하종강은 &lt;한겨레21&gt;과 &lt;한겨레&gt; 칼럼을 통해, 잔잔하지만 울림이 있는 글맵시로 여러 해 동안 노동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했다. 촬영은 강재훈 기자.
“소문대로 그는 원칙에 충실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2012년 11월에 하종강과 인터뷰한 김두식은 썼다. “하종강은 자기 삶을 ‘대단하고 특별할 게 없는데, 그저 남들보다 오래 했을 뿐’이라고 정리했습니다. 자기 자랑을 피하는 대신, 상담과 교육에서 느끼는 보람을 한참 이야기했습니다.” 하종강은 <한겨레21>과 <한겨레> 칼럼을 통해, 잔잔하지만 울림이 있는 글맵시로 여러 해 동안 노동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했다. 촬영은 강재훈 기자.

김훈은 소설가로 유명하다. 그전에는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2000년 강창광 기자가 찍은 사진이다. &lt;한겨레&gt;에는 기사도 쓰고 칼럼도 썼다. 마음을 흔드는 문장으로 삶의 현장을 그려냈다. 제목도 ‘거리의 칼럼’이다. 2002년 3월에는 집회장을 다녀와 “‘밥’에 대한 단상”을 썼다.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시위군중의 밥과 전경의 밥과 기자의 밥은 다르지 않았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밥이 그러할 것이다.” 지난해에 &lt;한겨레&gt;는 ‘2020 노동자의 밥상’을 연재했다. 김훈의 이 칼럼을 언급하며 “18년이 지난 지금, 밥은 여전히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일지 몰라도, 밥상만큼은 철저하게 개별적이더라”고 덧붙였다.
김훈은 소설가로 유명하다. 그전에는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2000년 강창광 기자가 찍은 사진이다. <한겨레>에는 기사도 쓰고 칼럼도 썼다. 마음을 흔드는 문장으로 삶의 현장을 그려냈다. 제목도 ‘거리의 칼럼’이다. 2002년 3월에는 집회장을 다녀와 “‘밥’에 대한 단상”을 썼다.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시위군중의 밥과 전경의 밥과 기자의 밥은 다르지 않았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밥이 그러할 것이다.” 지난해에 <한겨레>는 ‘2020 노동자의 밥상’을 연재했다. 김훈의 이 칼럼을 언급하며 “18년이 지난 지금, 밥은 여전히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일지 몰라도, 밥상만큼은 철저하게 개별적이더라”고 덧붙였다.

올림픽과 월드컵은 전세계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포츠 축제지만 다른 한편 국가주의가 제힘을 뽐내는 불편한 자리기도 하다. 2016년 7월 브라질의 리우 올림픽에 맞추어 조효제는 ‘올림픽, 스포츠, 인권’이라는 칼럼을 썼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하지만 스포츠 인권은 새로운 의제로 큰 주목을 받는다.” 그해 9월, 한겨레열린편집위원회는 “조효제의 칼럼으로부터 올림픽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관점을 얻었다”고 평가했다. 2002년에 임주환 기자가 찍은 사진이다.
올림픽과 월드컵은 전세계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포츠 축제지만 다른 한편 국가주의가 제힘을 뽐내는 불편한 자리기도 하다. 2016년 7월 브라질의 리우 올림픽에 맞추어 조효제는 ‘올림픽, 스포츠, 인권’이라는 칼럼을 썼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하지만 스포츠 인권은 새로운 의제로 큰 주목을 받는다.” 그해 9월, 한겨레열린편집위원회는 “조효제의 칼럼으로부터 올림픽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관점을 얻었다”고 평가했다. 2002년에 임주환 기자가 찍은 사진이다.

2016년 11월 &lt;한겨레&gt;에 최현숙의 인터뷰가 실렸다.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선생님은 좌파에, 커밍아웃한 성소수자에, 이혼녀에, 가난한 독거여성이세요. … 근데 놀라운 건 이 모든 걸 선생님이 스스로 선택하셨단 점이에요. 왜죠?” 이진순의 말에 최현숙은 껄껄 웃었다. “글쎄, 호기심 때문인가? 하여간 그게 ‘맛’있어요. 살맛을 거기서 느끼는 거죠.” 2016년에 강재훈 기자가 찍어둔 사진을 이번에 공개한다. 사진 속 최현숙은 당당하다, 읽는 사람의 마음을 두드리는 그의 책과 칼럼만큼이나.
2016년 11월 <한겨레>에 최현숙의 인터뷰가 실렸다.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선생님은 좌파에, 커밍아웃한 성소수자에, 이혼녀에, 가난한 독거여성이세요. … 근데 놀라운 건 이 모든 걸 선생님이 스스로 선택하셨단 점이에요. 왜죠?” 이진순의 말에 최현숙은 껄껄 웃었다. “글쎄, 호기심 때문인가? 하여간 그게 ‘맛’있어요. 살맛을 거기서 느끼는 거죠.” 2016년에 강재훈 기자가 찍어둔 사진을 이번에 공개한다. 사진 속 최현숙은 당당하다, 읽는 사람의 마음을 두드리는 그의 책과 칼럼만큼이나.

무엇을 쓸 것인가. 주제만 놓고 보면 “뻔한 이야기”라고, 최근의 칼럼에서 이상헌은 썼다. “모든 사람이 죽지 않고 일하고, 먹고살 수 있을 만큼 벌게 하고, 그렇게 살면서 차별 없이 존중받는 사회.” 그런데 유엔 국제노동기구(ILO)에서 일하는 자신은 “이 세 가지가 보장된 ‘철밥통’ 삶을 살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내 글쓰기가 늘 아슬아슬하고 불안한 이유다. 그래서 당신들이 글을 많이 써줬으면 한다. 그런 뻔하지 않은 글을 당신이 아니면 누가 쓰겠는가.” 2015년 토크콘서트에서 정용일 기자가 찍어둔 사진을 이번에 공개한다.
무엇을 쓸 것인가. 주제만 놓고 보면 “뻔한 이야기”라고, 최근의 칼럼에서 이상헌은 썼다. “모든 사람이 죽지 않고 일하고, 먹고살 수 있을 만큼 벌게 하고, 그렇게 살면서 차별 없이 존중받는 사회.” 그런데 유엔 국제노동기구(ILO)에서 일하는 자신은 “이 세 가지가 보장된 ‘철밥통’ 삶을 살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내 글쓰기가 늘 아슬아슬하고 불안한 이유다. 그래서 당신들이 글을 많이 써줬으면 한다. 그런 뻔하지 않은 글을 당신이 아니면 누가 쓰겠는가.” 2015년 토크콘서트에서 정용일 기자가 찍어둔 사진을 이번에 공개한다.

[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 시간의 극장 - 제29화 한겨레 역대 칼럼니스트 1편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979350.html

▶ 해설자인 김태권 작가는 만화가입니다. 글도 쓰고 일러스트도 그립니다. 개그도 연구합니다. 요즘은 주로 관악산 자락에서 두 아이를 떠메고 다니며 시간을 보냅니다.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와 <히틀러의 성공시대> 등의 만화책을 그렸고, <불편한 미술관>과 <에라스뮈스와 친구들> <먹히는 자에 대한 예의> 등을 썼습니다.

▶ 팩트스토리는 전문직·실화 소재 웹소설·웹툰 및 르포 논픽션 기획사입니다. 저널리즘 바깥으로 확장하는 실화를 추구합니다.

<한겨레>가 지령 1만호를 맞아 ‘시간의 극장-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선보입니다. 33년 사진, 기사, 지면 이미지 등의 아카이브를 활용하여, 중요 사건과 인물을 현대사 콘텐츠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입니다. 해당 주제를 잘 아는 해설자가 관련 한겨레 사진과 기사를 선정하고 독자에게 해설합니다. 소개된 적 없는 비컷(B-cut) 사진도 발굴하여 공개합니다. 르포, 전문직 소재 웹소설 기획사 팩트스토리가 기획하고 한겨레와 공동으로 제작합니다. 시즌3인 25~36화는 주로 기업·기업인 이야기로 꾸몄습니다. 주간 연재.

[알림] 한겨레 칼럼니스트를 공모합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78326.html

리영희, 정운영, 조영래, 박완서…. 더는 만날 수 없지만 영영 헤어질 수 없는 지성의 이름입니다. 시대의 죽비가 되고, 웃음이, 눈물이 되었던 <한겨레> 칼럼 필자들입니다. 오늘은 또 다른 필자들이 그 자리를 이고 집니다. 이제 <한겨레>는 언론 사상 처음으로 칼럼니스트를 공모합니다. 더 다양한 통찰과 감성을 발굴해 독자와 연결짓길 희망합니다. 희망이 절망에게, 슬픔이 기쁨에게, 과거가 현재에게, 꿈이 꿈에게, 그래서 우리가 우리에게 말을 겁니다. ‘한칼’, 시작합니다. 함께해주세요.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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