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11월 대통령 박정희는 중앙정보부를 시켜 이 현장에 들어갔던 장교와 하사관들을 조사했다. 민변 변호사들의 정보청구 소송 과정에서 1972년 8월14일 문제의 조사 문건 등을 마이크로필름으로 만든 정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나, 국정원은 명분을 바꿔가며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사진은 문제의 퐁니·퐁넛 학살 현장.
“햄릿이요?”
제목은 <더 햄릿>이다. 미국 작가 응우옌비엣타인에게 2016년 퓰리처상을 안겨준 소설 <동조자>에 나오는 영화다. 소설 속에서 이중간첩인 ‘나’는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한 할리우드 영화 제작 현장인 필리핀 루손섬으로 향한다. 주인공은 영화 제목을 접하고 깜짝 놀라 묻는데, 나도 소설을 읽다가 놀랐다. ‘햄릿’(Hamlet)은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의 제목이자 주인공 이름이지만, ‘아주 작은 마을’을 뜻하는 보통명사이기도 하다. 그렇다. 무대는 늘 작은 마을, 햄릿이었다.
지난번 이 칼럼에서 이승복을 다뤘다. 오늘은 제2의 이승복들에 관해 쓴다. 그리고, 조금 점프해 국가정보원에 관해 쓴다.
울진·삼척으로 침투한 120명의 북한 무장특수부대원 일당에게 이승복이 살해당했던 1968년, 한국군은 남베트남에 4만9869명을 주둔시켰다. 이는 북베트남 형제국가인 북한이 남한을 시도 때도 없이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더 햄릿>에선 미 특수부대원들이 악질 베트콩 ‘킹콩’과 싸운다. 한국군 임무도 ‘킹콩’ 소탕이었다. 그런데 ‘킹콩’ 대신 자주 엉뚱한 사람들을 죽였다. 어린이가 많았다. 얼마나 많았는지 직접 세보았다.
대표적 4곳을 표본으로 삼았다. 꽝남성 하미, 투이보, 퐁니·퐁넛(1968년), 꽝응아이성 빈호아(1966년). 희생자 명부에서 신원 확인된 이들 중 만 0~9살만 골라보았다. 하미 66명(144명 중 45%), 투이보 33명(82명 중 40%), 퐁니·퐁넛 25명(74명 중 34%), 빈호아 143명(389명 중 37%). 4개 마을에서 0~9살 평균 비율 39%였다.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희생자가 80개 마을 총 1만명 이상이라는 통계를 따르자면 최소 3900명이 0~9살이었다는 말이 된다. 베트남 어린이 대학살!
어린이를 뺀 다수는 부녀자·노인이었다. 도대체 왜 이들을 죽였나.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국정원을 상대로 소송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베트남전 태스크포스(민변 티에프) 임재성, 김남주, 오민애 변호사다. 2017년 8월부터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1969년 11월께 중앙정보부(중정, 국정원의 전신)가 1968년 2월12일 퐁니·퐁넛 마을에 들어갔던 장교와 하사관을 조사한 문건을 공개하라는 내용이었다.
퐁니·퐁넛 학살은 2000년 11월, 30년 만에 기밀해제된 미군 보고서 보도(<한겨레21>)를 통해 처음 문서로 확인됐다. 대통령 박정희는 1969년 11월 중정을 시켜 미군 문서에 등장한 부대 간부들을 수사하도록 했다. 특명수사였다. 퐁니·퐁넛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박정희도 궁금했던 것이다. 나는 20년 전, 중정에서 수사받은 1·2·3소대장 증언을 확보해 보도했다. 1소대장과는 10차례 만났다. 그도 수사기록 공개에 호기심을 보였다. 그 일을 지금 변호사들이 한다.
지난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권력기관 개혁 관련 언론 브리핑’에서 발표하는 박지원 국정원장. 박지원 원장 취임 뒤 국정원이 대공수사권 이관이나 사찰정보 공개와 관련해 전향적 태도로 나온다는 평가가 있기에, 네차례 법원 판결에도 불복하며 베트남전 장교·하사관 수사기록 공개를 거부하는 모습은 더욱 의아스럽다. 사진공동취재단
국정원은 ‘외교적 불이익’을 비공개 사유로 삼다가 2018년 1심(7월)과 2심(12월)에서 다 졌다. 상고를 포기한 국정원은 ‘조사 대상 장교의 개인정보 침해’를 비공개 사유로 다시 삼아 재판을 원점으로 끌고 갔다. 2020년 1심(1월)과 2심(10월)에서 국정원이 또 졌다. 12월18일엔 대법원까지 가겠다며 상고이유서를 냈다. 개인정보 침해라니, 당사자 1소대장도 공개를 원했던 문서다.
현재 민변 티에프 변호사들은 국정원 쪽 상고이유서에 대한 답변서를 쓰는 중이다. 그들은 시간 낭비 말고 박지원 국정원장이 용단을 내렸으면 한다. 대공수사권 이관이나 사찰정보 공개와 관련해 최근 국정원의 태도가 전향적이라 보기 때문이다. 네차례 법원 판결에도 불복하며 자료공개를 거부하는 옹색한 모습은, 그래서 더 의아하다.
소설 속 <더 햄릿>은 사실성이 떨어지는 오락영화다. 이제 한국 군인의 리얼리티가 흐르는 ‘더 햄릿’을 기다린다. 그 작은 마을에서 왜 25명 아이를 포함해 74명이나 죽이고 가옥을 불태웠을까. 이승복을 죽인 북한군처럼 꼬마들에게 “베트콩이 좋니, 따이한이 좋니”라고 물었을까? 그럴 리가. 유일무이한 51년 전 기록을 통해 진실을 알고 싶다. 박지원의 국정원은 상식적인 정보기관을 지향한다. 대법원 판결까지 가지 말고, 박지원 국정원장이 얼른 상식적 판단을 내리길 기대한다.
고경태ㅣ오피니언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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