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윤형의 신냉전 한일전 _13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의 2019년 3월12일 대한국 ‘보복 조처’ 발언에 놀란 외교부는 이틀 뒤인 14일 서울에서 한-일 국장급 협의를 열었다. 가나스기 겐지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이 경직된 얼굴로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로 들어서는 모습. 연합뉴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시점이 한국이 일본과 극한 충돌을 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가장 시급히 내려야 할 결정은 일본 정부가 지난 1월9일 한-일 청구권협정 3조 1항에 근거해 요청한 ‘외교 협의’를 받아들일지 여부였다. 하지만 한국 정부의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의 시선이 여전히 하노이의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3차 북-미 정상회담에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온 것은 미국으로 돌아가는 ‘에어포스 원’에 탑승한 뒤인 2019년 2월28일 오후 6시50분(한국시각)이었다. 문 대통령은 25분 동안 이어진 이 통화에서 “한반도의 냉전적 갈등과 대립의 시대를 종식하고 평화의 새 시대를 열어가는 역사적 과업의 달성을 위한 대통령의 지속적인 의지와 결단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의 통화는 저녁 7시30분부터 10분 동안 이뤄졌다. 아베는 그 직후인 저녁 7시47분 총리공저 앞에서 기자들과 만나 “안이한 양보를 하지 않고 건설적인 논의를 지속해 북한의 구체적인 행동을 촉구해간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결단을 전면 지지한다”는 소감을 밝혔다. 문 대통령이 회담 결렬에 대한 짙은 아쉬움을 감추며 차기 회담에 대한 기대를 드러낸 데 견줘, 아베는 트럼프가 ‘안이한 양보’를 하지 않은 데 대해 가슴을 쓸어내리며 기뻐한 것이었다. 한·일 두 나라 정상의 대조적인 반응을 통해 알 수 있듯 2·28 하노이 회담은 ‘한반도 비핵화’의 구체적 실현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북-미 간에 벌어진 ‘세기의 담판’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장한 한국’이 동아시아의 바람직한 미래상을 놓고 일본을 상대로 벌인 치열한 ‘간접 외교전’이기도 했다. 2017년의 격렬한 대립 이후 2018년 1월 극적으로 대화 국면이 시작된 뒤, 한국은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북-미 대화를 촉진해 70년 넘게 한반도를 억눌러온 냉전 질서를 해체하는 ‘현상 변경’을 시도했다. 문재인 정부는 스스로의 힘으로 “지난 대립과 갈등을 끝낸 새 평화협력공동체”인 ‘신한반도체제’를 구축하길 원했다. 문 대통령은 하노이 회담을 이틀 앞둔 26일 백범기념관에서 국무회의를 여는 파격을 선보이며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질서도 달라지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스스로 그 변화를 주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라고 말했고, 이어진 3·1절 100주년 기념사에선 “신한반도체제로 담대하게 전환해 통일을 준비해가겠다. (중략) 남북관계 발전이 북-미 관계 정상화와 북-일 관계 정상화로 연결되고 동북아 지역의 새로운 평화안보 질서로 확장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일본은 이 같은 한국 내 변화를 우려스러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에 맞서 일본은 북한의 핵 개발과 중국의 부상이 몰고 온 동아시아의 ‘신냉전’에 대비해 미-일 동맹을 강화하고 한국을 그 틀 아래 묶어두는 ‘현상 유지’ 전략을 추진했다. 기타오카 신이치 도쿄대 명예교수 등 아베 정권의 외교안보 브레인들이 모여 만든 ‘후지산 회합’이 2017년 4월 펴낸 정책 제언집 <더 강력한 동맹을 지향하며>를 보면 “일-미는 한국이 앞으로도 일-미-한 협력의 틀에 머물도록 협력해가야 한다. 앞으로는 (중국과 북한의 위협에 대응해) ‘일-미-한 방위협력 가이드라인’(3개국 공동작전계획)을 책정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냉전 해체와 통일을 목표로 독자 외교를 추진하는 한국의 움직임을 봉쇄해 지금처럼 미-일 동맹의 하위 파트너로 잡아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후 한-일 사이에서 전개되는 격렬한 공방은 동아시아의 바람직한 미래상에 대해 두 나라가 품고 있던 화해할 수 없는 전략관의 대립이 ‘하노이 노 딜’을 통해 폭발한 결과라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 무렵 한-일 관계가 사실상 ‘막장’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2월11일치 보도를 보면, 9일 도쿄 게이오대 현대한국연구센터에서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질서 구상’이란 제목의 한-일 공동 심포지엄이 열렸다.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의 기조연설이 끝나자 일본 내 대표적 한국 전문가인 기미야 다다시 도쿄대 교수가 “일본에 대해 아무 언급이 없는 것에 충격받았다. 이것이 현재 한국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냐”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이에 대해 문 특보는 “일본은 부정적인 외교만 적극적으로 할 게 아니라, (지금 진행되는 한반도 화해라는) 판이 되는 쪽으로 적극성을 가져야 한다”며 그동안 쌓아둔 불만을 드러냈다. 2·28 하노이 파국 이후 ‘일본의 역할’에 대한 한국의 불쾌감은 의구심을 넘어 적대감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한 예로,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은 3월2일 페이스북에 “하노이 담판 결렬 뒷전에 일본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하노이 외교 참사가 아베 정부의 쾌재로 이어지는 동북아 현실이야말로 냉엄한 국제정치의 속살”이라고 평했다. 일본을 맞서 싸워야 하는 ‘적’으로 바라보는 여론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노이 파국으로 사면초가의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은 일본이 아닌 한국이었다. 하노이의 대실패로 문재인 정부는 ‘남한 중재자론’에 근본적 회의를 갖게 된 ‘북한의 반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과 관련해 대응을 요구하는 ‘일본의 압박’, 한국의 대북 영향력을 회의하게 된 ‘미국의 불신’이라는 세 갈래 외교적 난제에 대처해야 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은 예상대로 일본의 압박이었다. 하노이 파국으로부터 열흘 남짓 지난 3월12일 오후 4시14분, 마루야마 호다카 의원이 중의원 재무위원회 발언대에 올라 “정부가 (한국에 대한 보복조처로) 관세 인상을 검토한다는 기사가 나왔다”며 한국에 ‘보복 조처’를 검토하고 있는지 거듭 물었다. 그의 질문은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배상 판결 문제로 악화될 대로 악화된 한-일 관계의 맥락을 떠올릴 때 매우 민감한 내용이었다. 결국,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이 답변대에 올라 “여러 대항 조처가 있다. 관세뿐 아니라 송금 정지, 비자 발급 정지 등 여러 보복조처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즈음부터 한국 언론에도 일본이 아소가 언급한 여러 조처 외에도 (7월에 실제 가동되는)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불화수소 수출 중단 등의 카드를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한다. 이 충격적 문답에 놀란 외교부는 이튿날인 13일 헐레벌떡 보도자료를 내어 “김용길 동북아국장이 14일 오후 외교부에서 가나스기 겐지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과 한-일 국장급 협의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시점이 한국이 일본과 극한 충돌을 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하노이 파국으로 발생한 위기를 넘기려면 일본을 자극하지 않는 ‘섬세한 외교’를 펼쳐야 했다. 가장 시급한 판단은 일본 정부가 지난 1월9일 한-일 청구권협정 3조 1항에 근거해 요청한 ‘외교 협의’를 받아들일지 여부였다. 이 요청을 받아들여야만 폭발 직전인 일본의 불만을 달래면서(즉, 시간을 벌면서), 한-일 외교 당국이 문제를 풀기 위한 진지한 협상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사법부의 판결에 정부가 관여할 수 없다”는 문 대통령의 1월10일 새해 기자회견 답변 때문인지 정부의 결정은 내려지지 않고 있었다. 청와대 방침이 없는 상황에서 국장급 당국자끼리 만나봐야 뾰족한 해법이 나올 리 만무했다. 회담이 끝난 뒤 가나스기 국장은 일본 언론에 “‘대항조처를 포함해 여러 선택지를 검토하고 있다’는 뜻을 한국에 전했다”면서도 “대응조처를 취하지 않는 편이 (일본 입장에서도) 훨씬 낫다. 먼저 (한국의) 대응을 지켜보겠다”고 여지를 줬다. 하지만 가나스기가 “지켜보겠다”고 말한 한국 정부의 대응은 이후에도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이수훈 대사가 4월8일 이임 인사를 건네기 위해 아베 총리를 방문했을 때도, 고노 다로 외상이 12일 이 대사를 재차 초치했을 때도, 23일 양국 국장이 서울에서 다시 만났을 때도 한국 정부는 묵묵부답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한-일이 거대한 충돌을 향해 달려가던 4월 중순에도 문 대통령의 시선은 하노이의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3차 북-미 정상회담에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11일 “북-미 간 대화의 동력을 빠른 시일 내에 되살리기”(문 대통령 1일 수석·보좌관 회의) 위해 백악관에서 트럼프와 정상회담에 임했다. 문 대통령은 머리발언에서 “중요한 것은 대화의 모멘텀을 계속 유지시켜 나가고 또 가까운 시일 내에 제3차 북-미 회담이 열릴 수 있으리라는 전망을 세계에 심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트럼프의 열정은 전보다 식어 있었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회고록 <그 일이 일어난 방>에서 3차 정상회담을 “판문점이나 미 해군 함정에서 열자”는 문 대통령의 제안에 트럼프가 “제안에 감사하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다음번 회담에서 실질적인 협정을 맺는 것”이라고 답했음을 전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동맹 갈등에 무관심한 트럼프마저 ‘한-일 관계는 어떠냐’며 우려의 뜻을 전해왔다는 점이었다. 문 대통령은 “과거 역사가 미래 양국 관계에 장애가 되어선 안 되지만 때로 일본이 이슈를 만드는 게 문제”라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그러는 사이 또 다른 복잡한 소식들이 전해져왔다. 첫째, 한국 원고인단이 일본 연호가 ‘레이와’로 바뀐 첫날인 5월1일 압류 상태에 있는 일본 기업 자산을 현금화하는 절차에 돌입했다. 두번째 소식은 그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침묵하던 북이 5월4일 오전 원산 호도반도에서 화력타격훈련을 실시한 것이었다. ※14회에선 격화되는 한-일 갈등과 남·북·미의 판문점 깜짝 회동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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