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 시대의 시작이 우리가 원하는 평화로운 세계질서를 가져온다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만큼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익보다는 맹목적 가치만을 앞세우며 미국을 짝사랑하고 북한을 증오하는 한국의 ‘가짜 현실주의자’들 역시 한반도 상황에 걸맞은 진정한 현실주의가 무엇인지를 먼저 고민하기를 바란다.
문정인ㅣ연세대 명예특임교수
12월14일 조 바이든 후보가 선거인단 투표에서 306표를 확보함으로써 지루했던 미국 대선 레이스가 공식 종료됐다. 이제 도널드 트럼프 시대의 악몽은 끝나고 새로운 미국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기대가 넘친다. ‘아메리카 퍼스트’와 일방주의, 거래주의라는 트럼프의 유산을 청산하고 자유국제주의에 기초한 상호 존중의 동맹 관계, 국제협력, 그리고 다자주의 외교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점을 바이든 후보가 명확히 해왔기 때문이다. 우리로서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신의 진화> 등의 저술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로버트 라이트는 12월15일치 <워싱턴 포스트> 기고문에서 바이든 행정부가 오바마 시절의 잘못을 반복할 가능성이 크다면서 네 가지 우려를 지적하고 있다. 정곡을 찌르는 예리한 분석이다.
첫째 우려는 전략적 겸손의 부재와 정치·군사적 개입주의의 일상화 가능성이다. 라이트는 그 구체적인 사례로 오바마 행정부의 리비아와 시리아 개입을 지적하고 있다. 현지 사정에 대한 치밀한 사전 분석 없이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만 믿고 2011년 리비아, 2013년 시리아에 뛰어들었다가 대규모 민간인 피해와 난민 사태를 야기했던 오바마 행정부의 실책이 재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두번째 약점은 인지적 공감대(cognitive empathy)의 결여다. 상대 국가나 지도자의 입장에 대한 존중이나 역지사지 태도 없이 일방적 외교·군사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크다는 염려다. 2013년 오바마 행정부는 민주주의 진흥이라는 명분 아래 친서방 반대파를 지원해 우크라이나의 민선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축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결과는 우크라이나 내전의 장기화와 러시아의 크림반도 침공이었다. 라이트는 우크라이나가 전통적으로 러시아의 세력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당시 오바마 외교안보팀이 간과하는 바람에 푸틴의 강력한 반발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이러한 오류의 반복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번째로 마니교적 선악 이분법이 바이든 행정부 외교안보 정책의 장애물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 이어진다. ‘언덕 위의 빛나는 교회’인 미국은 지고의 선이며 반대하는 모든 세력은 악이라는 이분법은 네오콘들의 전매특허가 아니며 바이든 팀한테도 이런 성향이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 국무장관 지명자 토니 블링컨은 세계가 기술민주국가와 기술독재국가로 구성돼 있으며, 민주주의 국가들의 연합을 통해 기술독재국에 대항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 바 있다. 네오콘과는 출발 배경이 다르지만, 중국이나 북한 같은 나라를 악으로 규정하고 미국의 도덕적 일방주의에 기초해 이들에 대한 정치·군사압박과 경제제재를 옹호하는 결론은 크게 다르지 않은 위험한 발상이라고 라이트는 비판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바이든 행정부가 국제법과 국제규범을 강조하는 자유국제주의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실제로는 개별 국가의 주권을 경시하고 국제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특히 유엔의 동의 없이 개별 국가의 정권을 교체하려는 미국 예외주의적 정치 성향이 재현될 수 있다는 개연성에 깊은 우려를 표한다. 자신을 진보적 현실주의자로 규정하는 라이트는, 바이든 진영의 외교안보팀이 표피만 자유국제주의일 뿐 실제로는 진보적 이상주의를 신봉하는 개입주의자들에 가깝다고 경고한다. 국익보다는 가치라는 명분 아래 군사개입과 전쟁, 그리고 무고한 인명 희생이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의 분석에 그대로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바이든 시대의 시작이 우리가 원하는 평화로운 세계질서를 가져온다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만큼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우리에게 주는 함의도 크다. 미국의 군사력을 과도하게 신뢰해 대북 무력사용 불사론을 운운하는 전략적 오만, 북한에 대한 역지사지를 내재적 접근이라고 비난하며 용공으로 매도하는 행태, 북한을 악마화하고 이를 타도하는 것을 역사적 소명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한국에도 넘쳐난다. 미국의 네오콘이나 진보적 이상주의자들과 결을 같이하는 이들이 자신을 현실주의자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자가당착이다.
과거의 오류를 보는 눈은 새로운 오류를 피하기 위해 가장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2021년 1월 출범하는 바이든 행정부가 전략적 겸손과 역지사지로 이성과 국제법, 규범에 따라 현명한 외교정책을 펼쳐 나가기를 기대해 본다. 더불어 국익보다는 맹목적 가치만을 앞세우며 미국을 짝사랑하고 북한을 증오하는 한국의 ‘가짜 현실주의자’들 역시 한반도 상황에 걸맞은 진정한 현실주의가 무엇인지를 먼저 고민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