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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오래된 본심 / 이승준

등록 2020-12-27 16:23수정 2020-12-28 02:40

2016년 5월28일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안전문(스크린도어) 유지보수 업체 직원 김아무개군의 가방에 있던 스패너 등의 작업 공구와 컵라면, 스테인리스 숟가락, 일회용 나무젓가락. 유가족 제공
2016년 5월28일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안전문(스크린도어) 유지보수 업체 직원 김아무개군의 가방에 있던 스패너 등의 작업 공구와 컵라면, 스테인리스 숟가락, 일회용 나무젓가락. 유가족 제공

어제 일도 기억이 잘 안 날 때가 많지만 어떤 기억은 방금 전에 일어난 일처럼 생생할 때가 있다. 사건팀 부팀장이던 2016년 5월29일 아침도 그중에 하나다. 전날(5월28일) 밤의 기사를 체크하다 ‘스크린도어 고치던 직원 또 열차에 끼여 숨져’라는 제목에서 멈췄다. ‘또….’ 부지런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지하철 안전문, 정비직원에게는 죽음의 문’ 10개월 전인 2015년 8월30일 <한겨레> 기사가 나왔다. ‘2년 전에도 비슷한 사망 사고’라고 부제가 달려 있었다. 부끄럽게도 스크린도어 정비가 그렇게 위험한 일인 줄 그때 처음 알았다.

후배 기자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나와 그는 취재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지켜야 할 안전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당 직원의 과실을 강조한 서울메트로(현 서울교통공사)의 발표에 흔들리고 있었다. 전화기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근데 숨진 친구가 오늘 생일이라네요.” 만 19살이 되기 하루 전날의 쓸쓸한 죽음…. “일단 빈소를 찾아서 유족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후배가 빈소를 찾자 유족들은 ‘19살 김군’의 이야기를 쏟아냈다고 한다. 누군가를 붙잡고 슬픔과 억울함을 토로하고 싶었는데 뒤늦게 언론이 나타난 것이다. 후배는 컵라면과 작업 도구 등 김군의 가방에서 나온 유품 사진을 모바일 메신저로 보내왔다. “인원이 적은데 수리 갈 곳은 계속 나오니까 아들이 밥도 잘 못 먹는다고 얘기했어요”라는 김군의 어머니 말과 함께.

이후 우리 사회는 김군이 왜 2인1조로 작업을 할 수 없었는지, ‘위험의 외주화’가 어떻게 노동자를 위협하는지 등의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후배 기자와 사건팀 팀원들은 한달 넘게 ‘김군’에게 몰입했다. 다른 언론들도 마찬가지였다. 김군의 잘못이 아닌, 구조적으로 곪아온 문제들을 드러내고 치료하던 시간이었다. 구의역을 가득 채운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는 시민들의 쪽지는 ‘시대정신’이었다.

“구의역 사고를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 때문에 사람이 죽은 것이고, 시정 전체를 다 흔든 것이잖아요.” “사실 아무것도 아닌데 걔(김군)만 조금만 신경 썼었으면….”

최근 공개된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의 서울주택도시공사(SH) 사장 시절 내부 회의 발언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줬다. 사고 한달 뒤인 2016년 6월30일. 나는 발언 날짜에 눈길이 갔다. 당시는 한창 구의역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고 재발 대책을 마련하며 사회적 합의를 이루던 시기다. 이날 박원순 서울시장은 직접 ‘구의역 사고 후속대책 2차 시민보고회’를 진행하기도 했다. 김군의 죽음을 ‘시정의 부담’으로 받아들인 변 후보자의 ‘본심’과 구의역을 가득 채운 ‘마음들’ 사이의 거리는 아득하다. 그가 ‘자연인’이라면 외면하면 그만이지만, 그는 이제 ‘시정’을 넘어 ‘국정’을 책임지는 자리에 지명됐다.

그러나 4년이 지나 인사청문회를 통과하기 위해 억지로, 급하게 그 거리를 좁히다 보니 잘될 리가 없다. 구의역 김군 동료들에게 거부당한 그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하는 국회 단식농성장에 무턱대고 찾아가 항의를 받았다. “건설 쪽에 있어서 교통은 잘 몰라서…(한 발언).” 건설이든 교통이든 산재 사망 방지는 국토부 장관의 주요한 임무인데 잘못된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다 보니 지난 22일 구의역을 찾아 스크린도어를 향해 묵념을 해도 아무런 울림을 주지 못한다.

“누군가 제발 큰 소리로 “저런!” 하고 외쳐주세요! 우리가 지옥문을 깨부수고 소년을 와락 끌어안을 수 있도록.”(‘갈색 가방이 있던 역’·심보선) 4년 전 구의역 스크린도어에 붙었던 추모시의 한 구절이다. 고 김용균씨를 비롯해 제2, 제3의 김군이 계속 나오는 사회에서 정치는 ‘지옥문’을 깨부술 수 있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두고 계속 주저한다. 여당은 큰 소리를 내고 제동을 거는 대신 “변 후보자는 정책 전문가”라고 엄호한다. ‘구의역 정신’과 이들 사이의 거리는 너무 멀기만 하다.

이승준|사건팀장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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