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석ㅣ문화비평가
치과 대기실엔 언제나 발목 정도의 두려움이 깔려 있다. 그러다 진료실에서 비명, 항의, 발버둥 소리가 들려오면 공포는 무릎 위로 가슴 위로 솟아오른다. 엄마 손을 잡고 있던 아이는 울상이 되고 농담을 주고받던 군인들도 표정이 바뀐다. 하지만 나는 평온하기 그지없다. 저 소리의 주인공이 내 친구이기 때문이다. 원래 엄살이 심한 친구냐고? 한 의사는 이랬단다. “초등학생도 안 그러는데.” 하지만 친구는 다른 의사의 표현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원래 통증의 역치(閾値)가 낮으신 것 같네요.”
사람들마다 아픔, 기쁨, 분노를 느끼는 감정의 계기판이 다르다. 참다가 참다가 밖으로 내뱉는 역치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아픔의 역치가 높은 편이다. 학교에서 단체로 매를 맞고 나면, 오만상을 찡그리며 곡소리를 내던 녀석들이 한마디씩 했다. “야, 아픈 척을 해야 적당히 때리고 말지. 넌 어떻게 표정 하나 안 바뀌냐?” 나는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았고 일이 힘들어도 앓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게 강한 것이고 감정을 잘 다루는 것이라 여겼다.
저 친구는 대부분의 감정에서 역치가 낮다. 같이 티브이나 영화를 보면 곧바로 알 수 있다. 감독이 짜증 내라고 하면 짜증 내고, 웃으라고 하면 웃고, 울라고 하면 눈물 콧물을 쏟아낸다. 보다 못한 내가 차가운 비평가의 마음으로 말한다. “솔직히 너무 속 보이는 연출 아니야?” “그건 나도 알지.” 하지만 짜증나고 웃기고 슬픈 걸 어쩌냐고 한다. 가끔 친구의 이런 면이 유용할 때가 있긴 하다. 정말 허술하게 만든 공포 영화를 같이 보더라도, 옆에서 진심으로 놀라고 무서워하니 나도 동화되고 만다. 인간 4D 특수효과, 생체 롤러코스터인 셈이다.
“제발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없어?” 영화관이나 티브이 앞에서는 대충 넘어가지만, 실생활에서는 널뛰기하는 친구의 감정을 지켜보는 게 너무 힘들다. 특히 적당히 넘어가면 될 일에 사사건건 화내는 걸 이해할 수 없다. 친구가 항변한다. “화가 나는 걸 어떻게 해? 그러는 너는 내가 화내는 걸 왜 못 참는데?” 그러고 보니 그렇네. 나는 옆의 누군가가 좋지 않은 감정을 표현하는 걸 못 견딘다. 그래서 친구가 화낸 일을 해결해보려고 들여다보는데, 그러다 스스로 분노에 휩싸이기도 한다. 얄밉게도 친구는 그때쯤 잊어먹고 헤헤거리고 있다. 친구가 번개탄이라면 나는 연탄이다. 한번 감정이 발화하면 그걸 통제할 능력이 약하기 때문에, 애초에 그 감정을 만들어내길 두려워하는 것이다.
나는 어지러움의 역치가 낮다. 그래서 장거리 버스와 놀이동산을 멀리한다. 나는 매운 음식의 역치가 낮다. 언제나 가장 순한 맛을 고르며, ‘약간 얼큰하다’ ‘맛있게 맵다’는 감언이설엔 속지 않으려 한다. 나는 알코올의 역치가 낮다. 그래서 일찌감치 술이 들어가야 가능한 사회생활을 접었다. 그러나 모든 불쾌한 감정 혹은 감각의 상황들을 피할 수는 없다. 결국엔 그것을 다루는 방법을 익혀가야 한다.
어릴 때 내가 가진 감정의 라디오엔 모노 볼륨 버튼밖에 없었다. 기쁨, 슬픔, 아픔이라는 감정들을 통째로 높이거나 낮춰야 했다. 거기에 개별적인 감정을 조종할 이퀄라이저를 장착할 수 있다는 건 뒤늦게 알았다. 그래서 남들보다는 늦었지만, 여러 감정을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연습을 하고 있다. 가령 기쁨의 호들갑은 높이면서, 불만의 군시렁은 낮출 수 있기를. 칫솔질할 때는 미세한 통증에도 민감하게, 치과에서는 아픔에 반응하는 볼륨을 최소로. 물론 쉽지 않고, 나의 경우엔 더 어렵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해온 친구들이 훨씬 더 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