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김병익 칼럼] 기억으로서의 크리스마스

등록 2020-12-24 21:28수정 2020-12-25 02:39

‘깡통교회’였는데 80명 안팎의 이 교회 학생회는 성탄절을 맞아 교단을 아담하게 장식했고 서로 선물을 교환했으며 성가대가 된 우리는 이브의 한밤부터 신자들의 집을 순방하며 캐럴을 부르고 성탄을 축하했다. 그 순방의 마지막이 교회에서 가장 멀었던 우리 집이었고 불교 신자인 어머니는 단팥죽을 쑤어 성가대원들을 먹이셨다.

내 다음 칼럼이 크리스마스에 게재된다는 통보를 받자, 내 기억 속의 성탄절을 불러내보기로 자연스레 작정했다. 교회를 나가는 것도, 신의 존재나 성령의 역사를 믿지 않으면서도 아직껏 나는 크리스마스라면 소년처럼 알 수 없는 그리움으로 조용한 흥분에 차 종교적 소망에 젖어드는 것을 느낀다. 고1 때 옆자리 친구의 꾐에 처음 교회를 나갔고 대학 2학년 4월, 문득 담배를 물면서 배교자로 선언하고서 지금껏 교회와 성경을 거절하며 살아왔지만, 청소년 시절의 그 짧은 기독교 체험은 눈 오는 12월이면 성탄절과 새해맞이가 겹쳐 아득한 그리움으로 되살아나면서 가슴은 설레고 머리는 신선한 기대에 이끌리던 어린 정서에 젖어들곤 했다. 기억 속의 크리스마스는 그처럼 집요하게 조용한 감동을 일으켜왔다.

글자를 겨우 아는 아들딸에게 시작된 나의 성탄카드 보내기는 어느새 중년의 나이를 지나는 지금껏 계속되고 있다. 몇해 전 문득, 내가 교회를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 자식들이 기독교와 상관없이 살고 있기에 이 짓거리가 부질없는 노인네 청승이 아닐까 싶어졌고 굽은 몸으로 서점에 나가 카드를 사고 상투적인 축복의 글을 쓰고 게으른 걸음으로 우체국을 다녀오는 수고가 힘들어지기도 해서 이제 카드 보내기는 그만두겠다고 메일로 자식들에게 통고한 적이 있었다. 며칠 후 대학 선생인 셋째가 집에 와 카드 몇장을 꺼내면서 여기에 전과 같이 크리스마스 축하 글을 써달라고 했다. 그게 빌미가 되어 자식들에게 카드 보내기는 계속되어야 했고 올해도 그 작은 수고를 치렀다. 아마 이 일은 내가 애비로서 살아 있는 한 맡아야 할 자식들에게의 시복 의례가 될 것 같은데 자신들은 교회 체험 없이 세상살이하면서도 어렸을 때 얻은 축복의 다사로움을 여전히 즐거운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에 나는 감동했다. 자식들과의 어린 시절 기억의 공유, 그 추억의 따뜻함이 내게도 다가온 때문이었다.

성탄카드를 처음 보게 된 1950년대 후반의 내 사춘기 시절, 이날만은 밤 12시가 되면 시행되던 통금이 해제되어 마음껏 나댕겨도 좋을 ‘자유의 밤’이 되었다. 교회에 발을 끊고 성인이 된 후에도 크리스마스이브가 되면 나는 거리를 배회하는 대신 티브이로 김수환 추기경님이 집전하는 명동성당의 성탄예배를 보았고 종로의 풍성한 밤거리 풍경도 즐겼다. 금지가 없는 자유는 그처럼 풍요롭고 따뜻했다. 그때의 크리스마스는 기독교 축일이기를 넘어 정서적 정신적 ‘해방구’가 되고 금제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의 축일’이었다. 얼마나 막혀 있었기에 1년에 단 하루, 성탄절 밤의 자유를 그처럼 환희로 받아들였을까. 신군부 독재에 대한 숱한 비판에 동조함에도 그 보상으로 해방 이후 35년 넘게 강요된 통금을 해제하여 일상의 통제에서 해방시켜준 일은 그래서 의외로 큰 의미를 가진 높은 업적으로 나는 평가한다. 이 통금 해제는 몇년 후 사상과 표현 및 출판의 자유라는 80년대 한국 민주주의의 비약적 계기에 우리가 모르는 새 큰 디딤돌이 된 것이다.

내게는 크리스마스가 안겨준 그리움이 더 있다. 내가 다니던 교회는 지방 도시의 개척교회로 깡통을 펴 반원형 퀀셋 지붕을 덮은 말 그대로의 ‘깡통교회’였는데 80명 안팎의 이 교회 학생회는 성탄절을 맞아 교단을 아담하게 장식했고 서로 선물을 교환했으며 성가대가 된 우리는 이브의 한밤부터 신자들의 집을 순방하며 캐럴을 부르고 성탄을 축하했다. 그 순방의 마지막이 교회에서 가장 멀었던 우리 집이었고 불교 신자인 어머니는 단팥죽을 쑤어 성가대원들을 먹이셨다. 그 따뜻한 회식이 화이트 크리스마스이브를 축하하는 소박한 인사자리가 되었다. 이때의 나는, 후에 돌이켜보면, 교회를 다녔음에도 정통의 신앙보다 아마 사춘기적 낭만에 젖어 있었지 싶다. 목사님 설교나 성경 말씀보다 그 교회를 오가는 한밤의 거리 걷기를 더 좋아했고 그 길을 걸으며 가로수들의 은근한 향기를 맡고 구름이 흐르는 저녁노을과 별빛이 옅어지는 여명을 그리움으로 안아, 가슴에 누볐다. 이 순수한 열망은 청년기의 열정과 번민으로 무신론의 독설로 바뀌었지만, 그럼에도, 12월이 되고 거리의 캐럴을 들으면 내 정서는 10대의 순진으로 돌아가, 무구한 시절들의 회상에 젖는다. 그것은 소년기로의 정서적 회귀이며 그 기억들의 안쓰러운 환기였다. 한창의 소년기에 치른 짧은 체험이었지만 그것은 범속한 일상으로부터의 탈속을 부르고 순결한 정조로 돌아가고 싶은 맑은 소망이 된 것이었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보며 그의 무신론과 교회의 폐해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도 그가 놓친 것이 있다고 생각한 것도 이 부분이다. 기독교가 2천년 동안 지은 잘못도 크지만 세계가 무지와 혼란으로 고통스러웠던 ‘축의 시대’에 그리스도의 사랑과 봉사의 미덕을 가르치고 그 윤리와 가치관이 신을 잃은 세속 사회에 여전히 엄숙한 규범이 되어왔음을 도킨스는 무시한 것이다. 미국 목회자의 반 넘어가 인격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고 서구의 많은 신학자들이 육체의 부활을 믿기보다 정신의 평정을 권고하고 있지만, 오늘의 보편적 가치관과 사랑의 윤리는 기독의 그 진정성에서 비롯되었고 그 인간학과 예술을 통해 정신적 연대와 정서적 공감으로 기억해온 때문이다. 폴 콜리어는 <자본주의의 미래>에서 “그러나 ‘신이 죽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올바르게 이해하면 그 의무는 우리에게 더욱 확고하게 지워진다”고 쓰는데, 그 의무는 2천년 동안 쌓이고 넓혀진 기억들이 오늘의 인류에게 부여한 보편적 정언명령이 되었다.

두달 전의 이 칼럼은 “가난한 마음이 순진을 낳고…”의 마태적 ‘낳고’의 변증으로 맺었다. 힘들었던 2020년의 마지막이 <권력은 사람의 뇌를 바꾼다>며 강준만이 꼬집듯 “개혁을 외치던 이들이 개혁의 대상이 되는” 진영 권력이 역병의 만연 속에 더욱 기승한다면, “탐욕은 거짓을 낳고 거짓은 억지를 낳고 억지는 탄압을 낳고 탄압은…”의 ‘묵시록적 낳고’의 변증을 부를지도 모른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스크루지는 참담한 자기 미래를 꿈에서 만나고 잠을 깨자 뜨겁게 회개하며 변신한다. 우리도 치열하게 솟구치는 4·19, 5·18, 6·29의 기억들로 21세기사에 새로운 계기를 만들고 스크루지처럼 세상을 고쳐 살 수 있다면! 거대 권력의 폭주를 멈춰 세워, 억지의 ‘패거리 과정’을 ‘진짜 공정의 과정’으로 지워내고 ‘20년 집권의 야욕’은 버려버리는, 정말 ‘정말(!)의 정의의 결과’에 이를 수 있기를, 나는 캐럴을 들으며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꿈꾼다.

김병익ㅣ문학평론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나의 완벽한 상사 [세상읽기] 1.

나의 완벽한 상사 [세상읽기]

최상목 ‘마은혁 임명’ 불복 땐 직무유기 [2월4일 뉴스뷰리핑] 2.

최상목 ‘마은혁 임명’ 불복 땐 직무유기 [2월4일 뉴스뷰리핑]

[사설] 이재용 항소심도 전부 무죄, 검찰 수사 실패 돌아봐야 3.

[사설] 이재용 항소심도 전부 무죄, 검찰 수사 실패 돌아봐야

‘사상 검증’, ‘연좌제’ 시대로 돌아갔는가? [권태호 칼럼] 4.

‘사상 검증’, ‘연좌제’ 시대로 돌아갔는가? [권태호 칼럼]

나르시시스트 지도자 손절하기 [뉴스룸에서] 5.

나르시시스트 지도자 손절하기 [뉴스룸에서]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