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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젊고 세련된 취향보다 중요한 것

등록 2020-12-23 17:16수정 2020-12-24 02:39

2011년 국가예술훈장 수여식에서 만난 도널드 홀(왼쪽)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 출판사 동아시아 제공
2011년 국가예술훈장 수여식에서 만난 도널드 홀(왼쪽)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 출판사 동아시아 제공

김은형 l 논설위원

이십대 시절 오륙십대 어른들을 보면 가장 궁금해지는 노화의 변화는 취향이었다. 나도 나이 들면 트로트를 좋아하게 될까? 반짝반짝 비즈가 빛나는 꽃분홍색 스웨터를 입을까? 항상 알록달록한 티셔츠를 입고 나훈아와 주현미를 흥얼거리던 이모는 연구 대상이었다.

영화 <타인의 취향>은 배 나오고 머리 벗겨진 ‘사장님’의 문화적 소양 부족을 비웃는 ‘문화귀족’을 거울처럼 비추며 취향 역시 얼마나 위계적인지를 보여준다. ‘중년의 취향’이란 것도 비웃음당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패키지여행 깃발 주변에 모인 원색의 아웃도어족, 이어폰이 아닌 핸드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 같은 것들 말이다. 노년의 취향은? 단춧구멍에 단추만 제대로 끼울 수 있어도 기적인데 무슨 놈의 취향!! 효도폰 등 단순하고도 손쉽기만 한 노인 전용 상품들이 많은 실패를 했음에도 노인들이 원하는 건 대문짝만한 글자와 팔다리가 잘 들어가면 그만인 옷이라는 생각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노년에 관한 매력적인 에세이집인 미국 시인 도널드 홀(1928~2018)의 <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인>에는 재밌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2011년 그는 국가예술훈장을 받기 위해 워싱턴에 갔다가 남는 시간에 국립미술관의 헨리 무어 전시를 보러 갔다. 산발한 백발에 휠체어를 타고 작품을 보는 그의 옆에 60대 경비가 다가와 조각가의 이름을 친절히 설명해줬다. 홀은 일찍이 무어에 관한 책을 한권 썼다. 전문가를 몰라봤다는 이유로 경비를 비난할 수는 없지만 그의 친절에는 휠체어에 탄 노인은 당연히 무어를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편견이 깔려 있었던 셈이다. 심지어 그는 카페에서 나오는 홀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맘.마. 잘. 먹.었.어.요?”라고 말했다.

그의 수모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수여한 메달을 목에 걸고 나란히 찍은 사진이 공개되자 한 젊은 블로거가 이 사진을 포스팅했다. 그는 “예티”(히말라야에 살고 있다는 전설 속 설인)가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사진 제목을 공모했다.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의 노시인이 대통령을 보고 기뻐하는 모습은 순식간에 놀림감이 됐다. 커트 코베인의 흐트러지고 떡진 머리는 완벽한 취향이 되고 여든 넘은 시인의 흐트러진 머리와 수염은 문명의 포기로 여겨진다.

다른 경우도 있긴 하다. 올 한해 중년 이상의 전유물인 줄만 알았던 트로트가 국민 장르가 됐다. 우리 집만 해도 인생의 모든 교훈을 임영웅과 정동원과 장민호의 예를 들어 이야기하는 외할머니와, 게임을 할 때도, 수학 문제를 풀 때도 ‘네가 왜 거기서 나와~’를 무한반복하는 손자가 그 어려운 취향의 세대 대통합을 이뤄냈다.

하지만 트로트가 해방됐다고 중·노년이 취향의 감옥에서 출소한 건 아니다. 대한민국 중년 남성의 몰개성적인 옷차림은 씹기 좋은 껌과도 같지만 아마 그들이 타투를 한다거나 스케이트보드를 배우겠다고 하면 가장 먼저 말릴 사람들은 그들의 몰개성을 흉봤던 자식들일 것이다. 겨울철이면 벤치 재킷에서 ‘뽀글이’로 전국민 교복 착장이 펼쳐지는 집단주의 문화에서 젊은 사람이 유행을 따라가거나 벗어나면 그저 취향 차이로 여겨진다. 하지만 중장년은 유행을 따라가면 주책, 안 따라가면 한물간 것이 된다. 하다못해 코로나 유행 전까지 인기가 급상승했던 달리기 소모임도 40~50대가 하면 ‘동호회’고 20~30대가 하면 ‘러닝 크루’였다. 하지만 섣불리 불만을 표했다가는 “라떼는 말이야” 대참사가 벌어질 수 있으니 입 다무는 게 상책이다.

홀도 전시장에서 자신이 무어 전문가임을 알리지 않았다. 경비를 당황스럽게 만들지 않고 싶었기 때문이다. 블로거와 아무 생각 없는 젊은이들의 작정한 조롱에도 대응하지 않았다. “급전직하의 실망스러운 결말”이라고 표현한 거 보면 꽤 상심했던 것 같다. 왜 아니겠나. 점잖은 노인들이 관대하다거나 인자하다는 이유로 상처 입지 않을 거라는 착각은 금물이다. 휠체어를 타고 행동이 느려진다고 해서 유모차의 아기처럼 “맘마꾸꾸”를 하는 건 아니란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조롱꾼들 사이로 홀의 옹호자들이 등장했고 그는 이 모든 것을 즐겼다. 그리고 글의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그녀(블로거)의 턱에 수염이 자라나기를 기원한다.”

뼈 있지만 악의 없는 농담 내공이다. 그는 자신이 겪었던 수모를 숨기거나 굳이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려고 하지 않고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줄어드는 처량한 현실도 농담거리로 삼는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나이 드는 게 두렵지만은 않아지는 것 같다. 맞춤 양복을 입고 훈계를 늘어놓는 노인보다 산발한 머리로 힘 뺀 농담을 하는 노인이 훨씬 더 근사하다는 걸 중장년들이 알아뒀으면 한다. 한국 중장년의 유머감각은 오이시디(OECD) 국가 중 최하위가 거의 확실해 유감스럽긴 하지만 말이다.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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