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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현의 저널리즘책무실] ‘누구 편이냐’ 물었죠?

등록 2020-12-15 17:22수정 2021-10-15 11:24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징계, 수위를 결정하는 1차 징계위원회가 열린 지난 10일 오전 경기도 정부과천청사 입구 앞에서 윤석열 총장을 응원하는 시위자와 비판하는 시위자가 나란히 피켓을 들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징계, 수위를 결정하는 1차 징계위원회가 열린 지난 10일 오전 경기도 정부과천청사 입구 앞에서 윤석열 총장을 응원하는 시위자와 비판하는 시위자가 나란히 피켓을 들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이봉현 ㅣ 저널리즘책무실장 (언론학 박사)

이 선배, 엊그제 <한겨레>는 누구 편이냐고 물었죠? ‘막싸움’ 양상인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의 대립에서 어느 쪽에 서 있냐는 질문이지요. 지금 벌어지는 일들이 ‘검찰개혁’이냐, ‘검찰 장악’이냐라는 양자택일의 채근으로도 들렸습니다. 하기야, 여당의 한 의원은 친검찰로 의심받는 법조기자단에서 한겨레 등이 앞장서 탈퇴해, 검찰개혁 의지를 입증하라고 했다죠.

이 선배가 보기에 윤 총장 징계 국면에서 한겨레의 논조가 모호했나 봅니다. 사실 기사, 사설, 칼럼, 만평 등에서 한겨레 내부의 ‘온도 차이’가 꽤 드러났습니다. 검찰개혁을 오히려 어렵게 하는 추 장관의 ‘헛발질’을 비판하는 글이 있는가 하면, 정치색을 노골화하는 윤 총장의 원초적 잘못을 질타하는 글도 여럿 있었습니다. 인식과 처방이 다른 글이 한 지면에 나오기도 했죠.(12월3일치 ‘2003년 평검사, 2020년 평검사’ 칼럼 및 ‘윤 총장 징계위, 절차적 흠결 없이 진행돼야’ 사설)

언론이 갈등 현안에 대해 입장이 명확한 것은 좋은 일이지요. 논조가 오락가락하거나, 양비론을 펼치는 언론을 독자가 미더워하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알다시피 그런 일관성과 명확성이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른바 ‘추-윤 갈등’은 대립하는 양쪽이 명분과 흠결을 함께 갖고 있고, 각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과거와 현재의 사건들도 얽혀 있습니다. ‘전체적인 그림’이 뭔지는 싸움의 흙먼지가 가라앉으면 좀 선명해지겠지만, 당장은 판단이 쉽지 않습니다.

2003년 <뉴욕 타임스> 첫 옴부즈맨이 된 대니얼 오크런트는 의견란에 불만인 독자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지요. “칼럼니스트는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쓸 자유가 있고, 독자들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사안이 복잡할 때 언론사 내부의 시각 차이는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는 뜻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언론의 숙명은 검찰개혁처럼 복잡한 사안을 매일 판단하고 보도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럼 어떻게 해야 잘하는 것일까요? 저는 몇가지 유형을 생각해봤습니다. 먼저, ‘갈지자형’입니다. 곤혹스러운 판단을 중지하는 것인데, 동력이 꺼진 보트처럼 이리저리 표류하는 기사가 나올 겁니다. 둘째는 ‘직진형’입니다. 진영의 색안경을 찾아 걸치는 것으로, 일관된 세상이 보이겠지만 사회에 독이 됩니다. 셋째는 ‘북극성형’입니다. 이것은 가치를 분명히 하고 이에 견줘 사안의 선후 경중, 시시비비를 가리는 겁니다. 밤길을 걷는 탐험가가 북극성을 보며 방향을 잡으면서도, 당장은 발아래 갈림길과 장애물에 집중하는 것에 비유할 만합니다. 방법의 일관성을 동력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세번째처럼 하면 양비론이 두려워 좌고우면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검찰개혁의 목표는 공정하고 중립적인 검찰을 만들어 민주주의를 내실화하는 것이지요? 이런 목표나 가치에 비춰 보면 윤 총장의 정치적 언행, 선택적 수사, 제 식구 감싸기는 개혁에 대한 저항으로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마찬가지로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와는 동떨어진 추 장관의 절차적 정당성 훼손도 그에 못지않은 강도로 비판해야 합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겨레는 공수처 발족이 검찰개혁의 중요한 이정표라 보고, 사설에서 야당의 비토권을 없애는 공수처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대통령 직속인 이 기구가 검찰과 사법부를 통제해 민주주의의 대전제인 삼권분립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우려가 기우만은 아닙니다. 야당의 견제장치도 무력화된 마당이지요. 당연히 한겨레는 검찰과 공수처를 포함한 권력기관이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제도와 관행이 정착되도록 부단히 감시하고 비판해야 할 겁니다.

앞으로도 한겨레 보도에 ‘온도 차이’는 날 겁니다. 다만, 그 차이가 내부 혼선의 표출이 아니라 가치에 바탕을 두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과정이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게 “너는 누구 편이냐” 묻는 선배께 드릴 대답입니다.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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