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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심채경의 랑데부] 22억년을 당신에게 달려왔을지도 모를, 우주의 인사

등록 2020-12-03 16:46수정 2020-12-04 02:39

심채경ㅣ천문학자

여기, 반짝반짝 빛나는 당신을 위한 온 우주가 있다. 더 많은 별빛이 당신에게 와 닿기 위해 우주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않았으면 한다.

가수 겸 작사가 메이비의 데뷔 앨범에 <어 레터 프롬 에이벨 1689>라는 곡이 있다. 에이벨(Abell)은 은하단을 조사하고 목록으로 만들었던 천문학자의 이름이다. 에이벨의 목록에서 1689번을 부여받은 에이벨 1689는 처녀자리에 있는 거대한 은하단으로, 수십 개의 은하들이 속해 있다. 이 은하들은 지구로부터 대개 22억광년 떨어져 있다. 1광년은 빛이 1년 동안 가는 거리이고 빛은 우주에서 가장 빠른 신호이니, 은하단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해도 우리는 그 사실을 22억년 뒤에나 알 수 있다. 그럴 리는 없지만, 만화에서처럼 에이벨 1689에서 휴대전화를 쓸 수 있다고 해도 지구에서 보낸 문자는 빨라야 22억년 뒤에나 전달되는 셈이다. 인연이 다한 사람과는 지척에 있어도 문자 한 통 보낼 수 없는 사이가 될 수도 있다. 에이벨 1689에 있는 것처럼 “시간조차 따를 수 없는” 아득히 먼 곳에 있는 상대방에게 망설이고 망설이다 한 글자씩 꾹꾹 눌러 쓴 편지는 아무리 일찍 부쳐도 “이미 늦어진 편지”다.

먼 우주에서 오는 신호에 대해 생각하면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영화 <콘택트>일 것이다. 조디 포스터가 분한 주인공 엘리 애로웨이는 아레시보에 있는 거대한 전파 망원경을 사용해 우주에서 오는 신호를 늘 모니터링한다. 외계 지적 생명체가 보내올지 모르는 신호를 받기 위해서다. 아레시보 망원경은 실제로 외계 지적 생명체 탐사 프로젝트뿐만 아니라 아주 멀리 있는 은하와 펄서에서부터 지구 근처의 소행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관측 성과를 올렸다. 그러다가 올해 여름부터 구조물이 간헐적으로 하나둘 떨어져 나가기 시작하더니 얼마 전에는 망원경 상단에 설치되어 있던 수신기가 아래의 305m짜리 거대한 반사 접시로 떨어져 내리며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영화에서는 아레시보 망원경이 외계와의 소통에 성공했지만, 실제로는 지난 57년 동안 외계의 인공 신호는 포착하지 못했다. 어쩌면 아득히 먼 곳에서 누군가가 보낸 신호가 아직 우리를 향해 날아오는 중일지도 모르는데.

밤하늘은 한없이 어둡고 우주는 광막해 보인다. 우리는 이 적막한 우주 공간을 홀로 맴돌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런데 사실 우주가 그렇게 텅 비어 있는 것은 아니다. 에이벨 1689 은하단은 일반적인 망원경 관측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허블 우주 망원경으로 그곳을 향해 며칠 동안 노출을 주면 수십 개의 은하가 가득 들어차 있는 사진을 얻을 수 있다. 텅 비어 보이는 밤하늘 여기저기에서 그런 지역들이 발견된다. 거대한 은하단들은 중력도 강해서 주변을 지나가는 빛도 휘어지게 한다. 일명 ‘중력 렌즈’ 현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은하단 때문에 주변의 빛이 휘어지는 중력 렌즈 현상을 분석하면 은하단 전체의 질량을 계산해볼 수 있는데, 그렇게 추정한 값은 보이는 은하를 세어 계산한 질량보다 훨씬 크다. 보이지 않는 암흑 에너지와 암흑 물질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우주를 구성하는 것 중 관측할 수 있는 물질은 약 5%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암흑 에너지가 약 70%, 암흑 물질이 약 25%나 차지한다. ‘암흑’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도통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직접 관측할 수는 없고 중력 렌즈 현상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 존재를 엿볼 수만 있다. 아무리 세상이 눈에 보이는 게 다는 아니라고들 하지만, 우리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다른 것들이 우주를 꽉꽉 채우고 있다니. 그것도 열아홉 배나 더 많이? 그렇다면 우주가 그렇게 적막하고 고독하기만 한 곳은 아닐지도 모른다. 잘 보이지 않고 잘 느껴지지 않지만 말이다.

텅 빈 우주에 홀로 남겨진 기분을 느꼈던, 이 세상에 ‘내 자리’는 없다고 느꼈던 이들을 기억해 본다. 그리고 상처받고 나약해지면서도 때때로 아닌 척해 보는 우리 모두를 생각한다. 우주가 그토록 텅 비어 있는 것은 당신과 내가 함께하기에 충분한 공간과 당신의 마음만큼 광막한 시간과 우리의 무한한 가능성을 포근히 담기 위함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우주가 그토록 빽빽이 들어차 있는 것은 어디 하나 불안정한 곳 없이 당신을 떠받치고 감싸 안기 위함이다. 여기, 반짝반짝 빛나는 당신을 위한 온 우주가 있다. 더 많은 별빛이 당신에게 와닿기 위해 우주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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