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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딸 없는 노년이지만 괜찮아

등록 2020-11-25 16:08수정 2020-11-26 02:37

미국 에이치비오(HBO)에서 방영한 드라마 <올리브 키터리지>(오른쪽 둘째 여주인공 역을 배우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맡았다)의 한 장면. 해안가 마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로 퓰리처상을 받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다.
미국 에이치비오(HBO)에서 방영한 드라마 <올리브 키터리지>(오른쪽 둘째 여주인공 역을 배우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맡았다)의 한 장면. 해안가 마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로 퓰리처상을 받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다.

김은형ㅣ논설위원

노년에 한발짝씩 다가갈수록 깨닫게 되는 것 중 하나가 인자하고 지혜로우며 관조하고 달관하는 노년은 매우 드물다는 사실이다. 어릴 때 노인들은 모두 <전원일기>의 최불암과 김혜자, 하다못해 주책스럽기는 해도 역시 따뜻한 일용엄니(김수미) 정도는 될 줄 알았는데 말이다.

노인에 대한 판타지는 <전원일기>에 있고 현실은 광화문 근처에 있다. 광화문에 모이는 노인들을 비난하려는 건 아니다. 확률적으로 봤을 때 정치적 성향만 뺀다면 적어도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은 ‘광화문 계열’로 늙어갈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어제는 엄마가 뭐랬는 줄 알아?” 나의 로또 큰언니가 이런 말을 하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 언니가 나의 로또인 이유는 2년 전부터 엄마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혼자 살던 엄마는 언니네 식구들과 함께 살면서 식사도 잘하시고 건강이 좋아졌다. 그런데 짜증과 고집과 ‘버럭’ 또한 엄청나게 늘었다. 치매 검사도 받아봤지만 지극히 정상. 성장기를 생각하면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자식들을 애틋하게 보듬던 순간들이 생생한데 지금은 엄마와 대화를 이십분만 하면 흘러나왔던 눈물도 다시 들어갈 지경이다.

그래도 엄마를 곁으로 모신 지 두달 만에 십년 넘게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는 내 친구보다는 사정이 낫다. 수십년간 공직자로 사회생활을 해온 친구의 엄마는 은퇴 십년 만에 억지와 불통의 화신으로 변모했다. 매일 카톡으로 친구가 분통을 터뜨리는 데 호응하다가 항상 서글퍼지는 대단원이다. 그러니까 우리도 별수 없이 저렇게 변한다는 거지? 인자는커녕 이기적이고 관조는커녕 호통을 치거나 끊임없이 누군가를 비난하는 노인으로.

굳이 노화에 관한 정보를 나열하지 않아도 왜 짜증과 분노가 생겨나는지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다. 나만 해도 노안 때문에 다초점 안경과 70㎝ 거리의 컴퓨터용 안경을 하루에도 수십번 바꿔쓰지만 약병 따위 라벨 위의 작은 글자들을 들여다볼 때마다 화가 치민다. 그러니 눈이 아파 책이나 티브이도 잘 못 보고 하루 종일 흑백의 바둑판만 응시했던 아버지의 답답함과 당신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는 데시벨로 킬킬대는 딸들에게 어머니가 느꼈을 서운함은 구체적이었으리라.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가져와 ‘통제권의 상실’을 이야기한다. “왕이었던 리어는 자신이 신과 비슷한 존재로서 모든 사람과 모든 일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리하여 나이듦에 대해 하나도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나이가 들면 통제권을 상실하고 돌봄을 필요로 하게 된다.” 리어왕만큼이나 비극적이게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통제권을 상실할 준비 없이 노년을 맞는다. 권력자도 아닌 사람이 무슨 통제권이냐 싶겠지만, 당신은 빨간 비즈 가득한 ‘할매룩’을 구가하면서 아직도 나의 옷차림을 끊임없이 핀잔하는 엄마에게서 포기 못 하는 통제의 욕망을 느낀다. 이러니 가부장제에서 집안의 왕으로 군림했던 일부 남성 노인들은 통제권이 박탈당했을 때 거리에라도 뛰쳐나와 삿대질이라도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일 터다.

그런데 통제권의 상실에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앞서 말한 친구 엄마는 늘 분노를 딸인 친구에게만 퍼붓지, 아들에게는 세상 점잖은 공무원 시절의 모습 그대로란다. 이주혜의 소설 <자두>에서 암 환자로 섬망 증세를 보이던 시아버지는 여성 간병인에게 정신 나간 듯이 패악질을 부리다가 간병인이 남자로 바뀌자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깍듯해진다. 노인의학과 돌봄에 관한 성찰을 담은 <나이듦에 관하여>에서 저자 루이즈 애런슨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노년기를 잘 보내기 위한 필수품이 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그때마다 써먹는 모범 답안이 있다. 바로 우월한 유전자(타고난 건강), 행운, 두꺼운 지갑, 착한 딸 하나다.” 나이 들어서 상실되는 통제권이 그나마 최후까지 발휘되는 건 돌봄노동을 강요받는 딸, 또는 여성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남성 저자가 쓴 곡진한 사모곡 같은 글은 믿음이 가지 않는다. 어머니를 모성애의 현신으로 그리는 그 절절함에는 어머니의 통제 밖에 있던 자식의 특권이 느껴지는 탓이다.

딸 없는 입장에서 나는 세상의 딸들이 좀 더 못되어지기를 바란다.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인자하거나 현명해지지 않는 것처럼 노년에 대한 자식 또는 누군가의 일방적 헌신이나 이해도 당연할 수는 없다. 나는 인자함을 포기한 대신 묵묵히 자식과 제자의 비난을 받아들이던 소설 주인공 올리브 키터리지(사진)처럼 의연함을 가지고 늙고 싶다. 노년의 품위란 통제권의 연장이 아니라 그 상실을 의연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얻을 수 있다는 걸 그녀를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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