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정치를 ‘타협’의 예술이라 했지만 그 이전에 정치란 ‘옳음’의 경쟁이다.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비전을 겨루는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옳음’들은 일관되게 추구되어야 빛을 발한다.
박권일 ㅣ 사회비평가
거의 20년 가까이 된 일이다. 온라인에서 정치 논쟁으로 밤을 지새우던 시절이다. 어느 새벽, 그동안 쓴 글을 일별하던 나는 패닉에 빠졌다. 몇 달의 시차를 두고 같은 주제에 대해 거의 정반대 논지로 글을 썼음을 깨달은 것이다. 아찔했다. 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거의 무의식적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지론을 뒤집었고, 며칠이 지나도록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기억상실도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유를 곰곰 생각해봤다. 그리고 알게 됐다. 당시 혐오했던 지식인이 내가 지지한 정당과 정치인들을 폄하했는데(그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 글은 그 반박이었다. 그런데 상대를 ‘밟아놓겠다’는 생각이 지나쳐서 논리가 꼬여버렸다. 논리만 꼬인 게 아니라 지지하는 당과 정치인을 잘못된 방식으로 옹호하고 말았다. 하찮은 증오 때문에 내가 견지하던 가치를 저버렸단 사실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이 일을 겪고 나는 더 이상 자신의 분별력을 믿을 수 없게 됐다. 정치적 사안을 두고 정념에 휩싸여 폭주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묶어둘 닻이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세 가지 원칙을 만들었다.
첫째, ‘지도자와 조직이 아닌 대의를 좇아라.’ 정치 이슈에서 절대적·보편적인 진리는 있을 수 없으며 결국 우리는 하나의 편파적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영논리가 유일한 선택지는 아니다. 진영논리는 이념이나 가치가 아니라 ‘우리 조직과 지도자의 유불리’가 기준이다. 이런 부족주의적 사고회로 속에서 비판이나 이견은 ‘내부 총질’로 낙인찍힌다. 반면 여기서 말하는 편파적 입장으로서의 대의는 당파성이다. 당파성은 가치 중심이다. 그러므로 핵심 가치가 무너지면 격렬한 내부 비판이 얼마든지 나온다. 이 원칙의 가장 큰 의미는 이성에 기반한 토론과 합의를 북돋는 데 있다. 민주사회의 구성원은 부족원이기 이전에 시민이기 때문이다.
둘째, ‘대의와 인간이 상충할 때 인간을 택하라.’ 여기서의 ‘인간’은 정치 지도자, 위인, 명망가 따위가 아니라 나와 같은 보통 사람, 약자, 소수자다.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는 사람일수록 진보적 가치에 적대적인 경우가 적지 않다.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는 이유는 이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사회적 조건을 바꾸기 위해서인데 정작 그 가치들, 예컨대 인권, 페미니즘, 생태주의 등에 그들이 거부반응을 보일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낙후”된 대중은 포기해버리고 말 통하는 사람끼리만 정치를 해야 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당파성이나 대의를 다소간 유보하더라도 함께 어깨를 겯는 것이 먼저다. 연대를 위해 대의를 전부 포기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잣대는 기득권자나 강자를 향할 때보다 훨씬 관대해야 한다. 이 원칙은 첫번째 원칙의 예외이자 부족주의의 장점(공감과 결속)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셋째, ‘사실관계가 모호할 때는 약자의 편에 서라.’ 대부분의 공적 사건들은 언론의 취재 대상이다. 경쟁하는 여러 매체의 보도를 종합하면 사건의 윤곽이 빠른 시간 안에 거의 드러난다. 문제는 팩트 자체를 알기 어렵거나 빠른 시간 안에 알 수 없는 경우다. 대표적인 게 권력자의 성폭력 사건인데, 꼭 성폭력이 아니라도 팩트가 잘 드러나지 않은 사건은 있을 수 있다. 당사자의 권력관계에서 누가 강자이고 약자인가는 대체로 명백하다. 열에 아홉, 공격받는 쪽은 약자다. 강자의 명성과 인맥은 이런 위기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또한 강자는 선망적 동일시의 대상이기 때문에, 처지가 비슷한 다른 약자들조차 일면식 없는 강자한테 감정이입해 약자를 때리기도 한다. 이럴 때 필요한 원칙이 바로 ‘약자’ 편에 서는 것이다. 그럴 용기가 없다면 차라리 침묵하라. 하지만 ‘중립’이나 ‘양비론’을 공공연히 선언하는 형태로 강자를 편들지는 말아야 한다.
각자의 ‘옳음’은 다를 수 있다. 누군가는 정치를 ‘타협’의 예술이라 했지만 그 이전에 정치란 ‘옳음’의 경쟁이다.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비전을 겨루는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옳음’들은 일관되게 추구되어야 빛을 발한다. 박정희적 가치든, 노무현적 가치든 어떤 숭고하고 아름다운 가치든 간에, 일관성 없는 ‘옳음’은 악취 나는 위선, ‘내로남불’일 뿐이다. 더 나은 사회의 꿈이 냉소와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 그게 바로 정치의 종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