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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퇴사가 아니라 졸사입니다 / 홍인혜

등록 2020-11-06 15:41수정 2020-11-07 14:29

홍인혜 ㅣ 시인

작년에 오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15년 넘게 광고업계에서 일한 나의 최종 직급은 무려 국장이었다. 이토록 오래 생을 투여한 일을 그만둔 데에는 원고지 천장으로도 부족한 겹겹의 고뇌가 있었다. 지면 관계상 수많은 행간을 압축하자면, 대표적인 퇴사 동기는 ‘번아웃’이라 하겠다. 일에서 보람을 찾은 지 오래되었고 그러다 보니 단순한 과업에도 한숨이, 일요일 밤에는 눈물마저 나왔기 때문이다.

회사를 떠나고 싶다는 욕망을 깨달았지만 막상 퇴사를 결행하는 데에는 번민이 많았다. 번아웃 운운하는 것이 나의 응석이 아닐까 수없이 반추했다. 날마다 행복에 겨워 일하는 직장인이 몇이나 되겠는가. 일에 지쳤다고 나가떨어지는 내가 영 나약하고 한심해 보였다. 돌아보면 당시 나는 ‘퇴사’라는 단어에 짓눌리고 있었다. 퇴사는 마치 퇴학처럼 여겨졌다. 정해진 과업을 성실히 수행하지 못하고 중도에 후퇴해버리는, 혹은 떨려 나가 버리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그때 우연히 알게 된 단어가 있었다. ‘졸혼’이라는 단어였다. 부부가 결혼 생활을 충분히 했다는 결론하에 혼인 관계에서 졸업한다는 뜻이었다. 결혼의 끝은 백년해로 아니면 이혼이라고만 알았던 나에게 졸혼이라는 개념은 신선했다. 그 경쾌한 발상의 전환을 마주하고 나 역시 결심을 새로이 정리했다. 나는 퇴사가 아니라 졸사를 하는 것이라고. 졸사는 업을 완수하지 못하고 중도 하차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해내고 완결 짓는다는 의미였다. 능력이 모자라 업장에서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일에 통달해 졸업한다는 의미였다.

행위를 새로운 언어로 정리하고 나서야 나는 사직서를 낼 수 있었다. 놀라운 일이다. 하나의 언어는, 고작 몇 개의 자모음이 늘어선 문자인 주제에, 목청을 울리는 찰나의 파장인 주제에 우리 영혼의 각도를 바꾼다. 같은 사건이라도 달리 규정하면 다른 시야가 열린다. 내 곁에는 주식으로 손해를 입은 지인이 있는데 그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잃은 돈을 손실금이 아니라 경제학교 등록금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고.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좀 낫더란다. 길고양이를 집에 들여 키우는 친구는 말했다. 누군가가 “고양이를 길에서 주워온 거야?” 하고 물으면 “로드 캐스팅해서 모셔온 거지”라고 말한다고. 그러면 고양이가 더 귀해지는 기분이 든단다.

나는 졸사 이후 강연도 종종 하는데 얼마 전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하셨다. 취미로 운동이든 악기든 다양한 강좌를 들어보고 싶은데 돈벌이도 안 될 취미 비용으로 너무 많은 돈을 투자하는 게 아닌가 가책이 든다고, 어떻게 하는 게 좋겠냐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지출을 ‘취미 비용’이 아닌 ‘교육비’로 규정하면 어떻겠냐고 말이다. 성인도 배우고 싶은 게 있고, 듣고 싶은 수업이 있다. 삶의 고정 지출액에 나를 먹이는 비용, 입히는 비용 외에 나를 교육하는 비용이 필요한 것이다. 교육비라니, 말만 바꿨을 뿐인데 어쩐지 써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는가?

언어를 바꾸는 것은 이렇게 유용하다. 나는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 6개월 넘게 평소 즐기던 기름진 음식과 고당질 음식을 끊고 관리 중이었는데 그럼에도 수치가 치솟은 암울한 결과를 맞이했다. 결국 고지혈증약을 처방받았는데 약을 받아 든 심경은 참담했다. 먹고 싶은 걸 다 참으며 그토록 애썼는데 소용이 없구나, 남은 평생 이 약을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니. 하지만 어차피 약을 먹게 된 마당에 내내 참았던 달걀과 튀김, 떡볶이를 푸지게 먹고 나는 생각을 바꿨다. 이 약을 ‘고지혈증 치료제’라고 생각하지 말고 ‘아무거나 먹게 해주는 요술약’이라 생각해야겠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요술처럼 마음이 조금 나아지더라 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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