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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병익 칼럼] 동심으로의 피정

등록 2020-10-29 17:23수정 2020-10-30 02:39

이 가을의 피정 끝내에 이르러 나는 쓰고야 만다: 아이들 세상의 “가난한 마음은 순진을 낳고 순진은 슬픔을 낳고 슬픔은 진정을 낳고 진정은 아름다움을 낳고, 아름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낳고, … 낳고,” 아, 마태의 저 복음적 낳고의 변증!

세상이 울울했다. 평생 겪은 이것저것 중 아직 못 치른 남은 한가지마저 당해보라는 듯 코로나19가 창궐해 거리와 상점은 삭막해지고 동네 거동에도 마스크를 써야 했으며 그것도 열달이 훌쩍 넘어도 쉬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여름에는 드물게 긴 장마와 그에 이은 태풍이 불어댔다. 여기에 가슴 답답하고 못마땅한 것이 어른들이 벌이는 정치판이었다. 스스로 때문에 일어난 문제들을 그것도 기울어진 진영논리로 해결하겠다고 다시 싸움을 벌이는 정치판에서 평등-공정-정의의 실현은 점점 멀어지는 듯싶었다. 세상은 허울처럼 아름답지도, 사랑스럽지도 않아, 외려 추접스러운 곳이었고 끝내 촛불 광장에 버스 성벽이 둘러쳐지며 정작 한글날 광화문의 세종대왕은 참으로 외로워야 했다. 바르고 밝은 모습들 좀 봤으면, 하는 내 볼멘 말을 들은 아내가 상자 하나를 꺼내왔다. 거기에는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훌쩍이며 보던, 덩달아 나까지도 감동의 회상에 젖던 옛 동화집 몇권이 들어 있었다. 이 가을, 동심으로의 피정(避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무심코 처음 잡은 책이 아미치스의 <사랑의 학교>였다. 소년 시절 이 동화집을 보며 이처럼 단정한 아이들이 있을까 싶게 깊은 인상을 받은 책에는 70여년 만에 보아도 잊히지 않은 이야기가 있었다. 생활에 보탬을 주려고 아버지가 매일 밤 봉투쓰기 가욋일을 하는 걸 안타까워한 아들이 늦은 밤 몰래 아버지 대신 그 봉투쓰기 일을 한다. 아버지는 자기가 예상보다 일을 많이 했다고 즐거워하며 점차 학교 성적이 떨어지는 아들을 야단쳤지만, 뒤늦게 자기를 돕다가 탈이 난 것을 깨닫고 깊은 정에 겨운 사랑으로 아들을 껴안는다. 이 감동에 이어 내게 매우 실감 있게 다가온 이야기가 귀족 학부형의 처신이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반 친구를 조롱하다 말싸움을 벌이는 아들의 ‘비열한’ 짓을 보고 아버지는 “네 아버지에 대해서 버릇없이 함부로 말한 것을 사과한다고 친구에게 잘못을 빌라”고 훈계하고 담임 선생에게 두 학생을 책상에 나란히 앉혀줄 것을 부탁한다. 귀족사회임에도 노블레스의 평등과 겸손의 태도를 가르치는 이 넘치는 ‘양식의 교실’에서 담담한 교훈 하나를 다시 배웠다.

다음 이야기가 <플란더스의 개>였다. 지금 보니 비운을 지나치게 한자리에 모아놓은 것이지만, 어렸을 때 먹지 못하고 추위에 떨고 동네 사람들에게 돌림당하는 네로와 그의 개 파트라슈는 세상의 모든 불행을 맡아 들이면서 그 이야기를 읽는 내 어린 심정까지 큰 슬픔으로 빠트렸는데, 더욱 비통했던 것은 천재적인 솜씨가 발휘된 네로의 그림이 뒤늦게 발견되어 최고상 수상 소식을 놓쳤고 그걸 알지 못한 소년은 실망에 젖어서도 그처럼 보고 싶어 하던 루벤스의 그림을 보고 행복에 겨워하며 끝내 숨진다는 더할 수 없이 아픈 대목이었다. 삼국지를 즐겨 읽던 소년 시절의 아들도 이 장면 앞에서 숨을 멈추고 고개 숙이고 한동안 침묵에 젖어 있던 것이 기억났다. <한네레의 승천>은 이보다 더 가난하고 외롭게 죽은 소녀의 마지막을 그리고 있는데, 여든 넘어 세속에 닳고 닳은 눈으로도 한네레와 네로의 운명은 어떤 변명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이 세계의 빈한과 학대의 증언이었다. 그들의 더없이 슬픈 죽음들은 전 시대의 절대 빈곤이 자아낸 절대 비애를 불러일으키면서 복잡한 이론이나 주장에 앞서, 세계의 비정함을 피할 수 없이 만나야 할 인간의 냉혹한 상황과 존재론적 애상(哀傷)이 새삼 나의 낡은 정서를 순수로 적셔준다.

그다음 내 손길이 닿은 것은 스페인 동화 <빵과 포도주, 마르셀리노>였다. 이 책은 내 마음가짐을 신성하게 진정시켜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60년 전의 대학 시절 이미 시인이 된 두 친구와 함께 극장에서 영화로 본 이야기인데 흑백의 그 중세적 웃음에 매혹되어 후에 동화책으로, 디브이디로 구해둔 것이었다. 수도원 앞에 버려진 아기를 남자 수사들이 기르는 데서 벌어진 즐거운 수선들 속에 참으로 짓궂은 장난꾸러기이면서도 더없이 순진한 어린이로 자라는 마르셀리노는 어느 날 우연히 숨어든 다락방에서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박혀 한없이 주리고 목말라하는 슬픈 남자를 만난다. 소년은 마음이 아파 주방에서 수사들 몰래 빵과 포도주를 훔쳐 그에게 가져다주기 시작한다. 마침내 소년은 그의 소망을 들어준 예수에게 안겨 엄마가 계신 하늘나라로 오르고 수사와 동네 사람들은 그 다락방이 영광의 광휘로 빛나는 기적을 보며 모여든다. 아기의 마음이 곧 맑고 즐겁고 따뜻한 천국이었다.

마해송 선생이 쓴 <바위나리와 아기별>은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화로 알려져 있는데, ‘감정바위’ 틈에서 싹을 틔운 나리와 그 꽃을 내려다보는 아기별의 아픈 이별을 통해 어떻게 열여덟 어린 문학소년이 그처럼 생명 가진 것들의 헤어짐과 외로움을 형상화할 수 있었는지 놀라웠다. 백년 전의 그 새삼스러움을 다시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생동하게 만든 이야기를 최근 민병일의 <바오밥나무와 방랑자>에서 보았다. 한자리에 서서 몇천년의 세월을 읽어온 나무와 그 세상의 살아 있는 것들의 마음들을 떠돌며 들어온 방랑자의 교감을 통해 슬픔에 적신 가난한 영혼들과 그것들의 어울림에서 빚어진 위로의 언어와 본원의 지혜는 내가 볼 수 있었던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삶에의 직관을 보여주고 있었다. 가령 “나무는 자연이 주는 고통마저도 축제로 받아들이고 고통을 생명체로 한 뼘 더 크기 위한 성장통으로 생각한다는 것, 자연이 남긴 상처가 나무들의 삶”이란 말, “따뜻한 음악이 생의 기쁨이나 비애, 사랑이나 절망마저도 무화시키는 따뜻한 허무”라는, “방황하는 한 인간은 아름답고 방황하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오오 불완전함이 삶을 치유한다”는, 그리고 “인생은 상처를 통해 완성된다”는 속삭임.

이 자유롭고 따뜻한 메르헨이 부르듯, 소년 시절의 동화들에서 “어린 날의 순수한 꿈과 동경, 장난 등 잊힌 시간으로 불려”나온 나는 사랑을 ‘길들임’으로 다듬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마지막의, 맞닿은 두 능선과 그 위에 별 하나로 이룬 그림을 이 세상 서사의 가장 아름다운 피날레로 보아왔는데, 이제 그 외로운 하늘 빈자리에 민병일의 끝마디가 꽂힌다. “노을에 찍힌 새발자국”! 눈 아린 이 이미지는 내 속 가장 여린 자리에 ‘뜨거운 상징’으로 각인되고 있었다. 그래서, 이 가을의 피정 끝내에 이르러 나는 쓰고야 만다: 아이들 세상의 “가난한 마음은 순진을 낳고 순진은 슬픔을 낳고 슬픔은 진정을 낳고 진정은 아름다움을 낳고, 아름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낳고, … 낳고,” 아, 마태의 저 복음적 낳고의 변증!

김병익 ㅣ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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