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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제왕’이 ‘은둔’했던 이유 / 김영배

등록 2020-10-27 16:09수정 2020-10-28 02:38

2003년 10월10일 이건희 회장이 경기도 화성 삼성전자 메모리 연구동 전시관에서 황창규 사장으로부터 차세대 메모리에 관해 설명을 듣고 있다. 이 회장은 25일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8세. 2014년 5월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진 뒤 6년 만이다. <한겨레> 자료 사진
2003년 10월10일 이건희 회장이 경기도 화성 삼성전자 메모리 연구동 전시관에서 황창규 사장으로부터 차세대 메모리에 관해 설명을 듣고 있다. 이 회장은 25일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8세. 2014년 5월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진 뒤 6년 만이다. <한겨레> 자료 사진

김영배 ㅣ 논설위원

이건희 회장에게 ‘은둔의 제왕’(The Hermit King)이란 별명을 처음 붙인 것은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였다고 알려져 있다. 뉴스위크는 2003년 11월24일치 아시아판 표지기사로 이 회장을 다룰 때 은둔의 제왕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말수가 적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 혼자 몰입하기를 좋아하며, 공개석상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경영자라는 뜻이었다.

삼성을 비롯한 재벌 문제에 오랫동안 천착해온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이 ‘제왕’의 ‘은둔’에 대해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은 적이 있다. 한성대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로 재직 중이던 2014년 5월 <한겨레>에 보내온 글에서였다. 이 회장이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쓰러진 뒤, 만일에 대비해 받아뒀던 그 글은 지면에 끝내 실리지 못했다.

김상조 실장은 당시 글에서 “(이 회장이) 은둔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게 아니라 환경적 제약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측면이 강하다”고 했다. 1987년 그룹 총수에 오른 뒤 초기엔 이병철 선대 회장 시절에 구축된 강력한 참모조직을 제압하지 못했고, 그 뒤에도 외부 요인 탓에 경영 일선에 나서지 못한 때가 꽤 있었던 사실에 바탕을 둔 해석이었다.

이 회장은 1999년의 폐암 수술 등 건강 문제로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잦았고, 자동차를 비롯한 신규 사업의 실패와 갖가지 정치·사회적인 이슈에 얽혀 경영 일선에서 한발 떨어져 지낸 일이 적지 않았다. 2008년 4월엔 비자금 사건 여파로 공식 퇴진했다가 2년가량 지난 뒤 복귀한 일도 있다.

이 회장의 경영 이력과 성과를 설명할 때 가장 중요한 시기로 꼽히는 건 1993년이다. 한솔·신세계(1991년)에 이어 제일제당(현 CJ)의 계열 분리로 선대 회장의 유언에 따른 3남5녀 간 재산 분할을 마친 시점이었다. 양적 경쟁에서 질적 경쟁으로 전환을 주창한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한 해이기도 하다. 2세 경영인인 이 회장이 명실상부한 총수 자리에 오른 건 이때였다고 할 수 있다.

언론에선 이 회장의 1993년 ‘신경영 선언’ 뒤 삼성이 줄곧 승승장구한 듯 묘사하고 있지만, 실상은 달랐다. 자동차·유통·문화콘텐츠 등 새로운 분야에 뛰어든 뒤의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자동차 사업의 대실패는 그룹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로 심각했다. 2세 경영인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 상당수 국내 재벌 그룹에서 2세 승계가 이뤄졌고, 이들 2세 총수가 무리한 사업 확장을 시도했다가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아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양상이었다.

자동차 산업으로 대표되는 이 회장의 신규 사업 실패는 삼성에서 재무팀 위주의 보수적 경영 전략이 자리를 잡는 계기가 됐다고 김상조 실장은 풀이했다. 문어발식 확장으로 치닫다가 몰락한 대우그룹과 달리 ‘잘할 수 있는 일만 열심히 하는’ 선택과 집중 전략을 폈고, 이것이 삼성전자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이 회장의 경영 이력과 성과에 대한 포폄에서 김상조 실장의 관점 또한 절대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다양하게 제기되는 여러 견해 중 하나일 뿐이다. 다만, 이 회장 별세 뒤 찬사 일색으로 흐르는 숱한 언론 기사들을 되짚어 보게 하는 성찰의 실마리가 담긴 대목은 눈여겨볼 만하다. 정경유착, 불법 경영권 승계, 무노조 경영 같은 정치·사회적 논란거리는 제쳐두고 기업적 성과만 놓고 보더라도 명암이 교차했고, 비약적인 성공의 이면에 실패의 경험이 아울러 녹아 있다는,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하고 평범한 사실을 새삼 일깨운다.

명암을 두루 짚는 게 고인을 깎아 내리는 일일까? ‘반도체 신화’를 일군 거목의 경영인도 한계와 흠결을 안고 있는 한 인간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공과를 두루 짚어내는 것이야말로 사실에 근접하는 것일 뿐 아니라 고인을 진정으로 기리는 길이라 믿는다.

이 회장이 기업 경영에서 실패를 딛고 시련을 거치는 과정은 그 뒤로 이어지는 성취가 갖는 의미와 교훈을 보다 정확히 보여준다. 삼성, 나아가 한국 재계의 후세대 기업인들이 진정으로 본받을 점도 그 과정 속에서 추출될 것이다. 하늘 높이 끌어올려진 무오류의 신적 존재로부터 도대체 뭘 배울 수 있겠는가? 그저 경탄과 숭배의 대상일 뿐이니 말이다.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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