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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북-미 협상 교착에 일본 ‘대북 압박’ 재가동

등록 2020-10-20 18:57수정 2020-10-21 02:06

길윤형의 신냉전 한일전 _08
싱가포르에서 열린 6·12 정상회담 이후 북-미 핵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일본이 힘을 기울인 것은 북한 선박의 밀수 단속이었다. 2018년 6월12일 오전 9시10분께 북한 선박 유평5호가 소형 선박으로부터 호스를 통해 무언가를 공급받고 있다. 일본 해상자위대 제공
싱가포르에서 열린 6·12 정상회담 이후 북-미 핵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일본이 힘을 기울인 것은 북한 선박의 밀수 단속이었다. 2018년 6월12일 오전 9시10분께 북한 선박 유평5호가 소형 선박으로부터 호스를 통해 무언가를 공급받고 있다. 일본 해상자위대 제공

북한의 환적 밀수가 끊이지 않자, 외무성과 방위성은 8월31일 해상자위대가 촬영한 북한 선박의 환적 밀수 장면을 3분19초짜리 영상으로 만들어 유튜브를 통해 공개했다. 이어, 해상자위대는 한반도 주변 해역의 정찰 강화에 나선다. 자위대의 활동 변화는 2018년 12월20일 동해에서 발생한 ‘해상자위대의 위협비행 및 한국 해군의 레이더 조준’ 사태라는 커다란 폭풍우를 불러오게 된다.

싱가포르에서 열린 6·12 북-미 첫 정상회담을 설명하기 위해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회고록 <그 일이 일어난 방>에서 가장 먼저 사용한 형용사는 ‘애매모호하다’(ambiguous)는 것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서 회담 결과를 전해 들은 한·일 양국 역시 혼란스러워질(confused) 수밖에 없었다. 회담에 직접 참여했던 볼턴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트럼프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회담 이후 가장 큰 혼란에 빠진 이는 틀림없이 협상 당사자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었을 것이다. 김 위원장은 회담을 통해 트럼프가 북한이 주장해온 ‘행동 대 행동’, 즉 북·미가 서로 신뢰를 쌓아가며 하나하나 비핵화 작업을 진행해 가는 ‘단계적 비핵화’ 해법에 동의했다고 믿고 있었다. 그랬기에 회담 다음날인 13일 <노동신문>은 3면에서 “조미 수뇌분들께서는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 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이뤄나가는 과정에서 단계별, 동시행동 원칙을 준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 대해 인식을 같이했다”고 쓸 수 있었다.

미국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6·12 정상회담을 치적 과시를 위한 ‘거대 홍보 이벤트’로 생각했던 트럼프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볼턴과 폼페이오는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동의한 적이 없었다. 이들의 유일한 관심은 ‘하루빨리’ 북한을 비핵화 과정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북한에 정말 비핵화 의지가 있다면, 자신이 가진 핵무기와 탄도미사일 등 핵 관련 리스트를 ‘신고’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 같은 엄청난 인식의 불일치를 동반한 채 7월6~7일 폼페이오의 3차 방북이 이뤄졌다. 폼페이오가 협상 상대인 김영철 당시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에게 어떤 얘기를 쏟아냈을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비핵화의 첫걸음으로 핵시설 등의 ‘신고’를 요구하는 폼페이오에게 김영철은 휴대전화를 집어 던지며 “트럼프에게 전화하라. 트럼프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소리쳤다. 김영철의 강경 자세에 폼페이오는 크게 낙담했다. 그는 평양행에 동참한 미국 기자단에게 “대부분의 중심적 이슈에 대해 진전을 이뤄냈다”고 말했지만, 7일 오전 7시 반(한국시각) 워싱턴에 전화를 걸어 회담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불만스러웠고, 거의 진전이 없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폼페이오는 김정은 위원장과 만나지도 못한 채 평양을 떠났다.

하지만 북한은 그보다 100배는 더 큰 당혹감을 느꼈다. 이를 보여주는 문서가 있다. 폼페이오가 평양을 떠난 바로 ‘그날 밤’, 외무성 대변인은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미국에 대한 ‘깊은 배신감’을 토로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본문에 담긴 ‘강도 같은 요구’라는 독특한 표현으로 역사에 기록된 울분에 찬 담화였다.

“(우리 쪽은) 조-미 관계 개선을 위한 다방면적 교류를 실현할 데 대한 문제와 조선반도에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하여 우선 조선정전협정 체결 65돌을 계기로 종전선언을 발표할 데 대한 문제, 비핵화 조처의 일환으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생산 중단을 물리적으로 확증하기 위하여 대출력발동기 시험장을 폐기하는 문제, 미군 유골 발굴을 위한 실무협상을 조속히 시행하는 문제 등 광범위한 행동조처들을 각기 동시적으로 취하는 문제를 토의할 것을 제기했다.” “그러나 미국 측은 싱가포르 수뇌상봉과 회담의 정신에 배치되게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요, 신고요, 검증이요 하면서 일방적이고 강도적인 비핵화 요구만 들고나왔다. 이미 합의된 종전선언 문제까지 여러 조건과 구실을 대면서 멀리 뒤로 미뤄 놓으려는 입장을 취하였다.”

진정 6·12 싱가포르 회담이 한반도의 냉전 구조를 단숨에 깨뜨릴 ‘역사적 회담’이었다면, 문재인 대통령이 고집스레 강조하는 종전선언 역시 2년 전인 2018년 7월27일 현실화됐을지 모른다. 결국, 모든 것이 ‘신기루’에 불과했다. 볼턴 회고록에 따르면, 트럼프 역시 폼페이오가 전화로 전해온 북한의 신뢰 쌓기 요구에 “말똥 같은 소리”(horseshit)란 반응을 보였다. 이 시점에서 6·12 싱가포르 공동선언은 북-미 정상 간의 기묘한 ‘브로맨스’를 제외한다면 사실상 무용지물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한국 정부의 처절한 중재 노력이 이어진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7월19~21일, 정의용 당시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20~21일, 서훈 당시 국가정보원장은 26~29일 잇따라 워싱턴을 찾았다. 남북이 합의한 4·27 판문점 선언 이행과 교착 상태에 빠진 북-미 대화를 촉진하기 위해서였다. 한국 정부가 종전선언에 집착하자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는 8월2일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종전선언을 하려면 북한이 비핵화를 향해 상당한 움직임을 보여야 한다. 북한이 신뢰구축의 길로 갈 수 있는 핵심이자 본질적인 조처는 완전한 핵시설 목록을 제공하는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종전선언을 위해선 북한이 핵시설을 먼저 신고해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이었다.

북-미 대화가 암초에 부딪히자 일본은 대북 압박 강화에 정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2017년 9월 결의 2375호를 통해 북한 선박과 공해에서 물품 이전을 금지했고, 2397호에선 대북 정유제품 공급량을 연간 200만배럴에서 50만배럴로 대폭 줄였다. 그러자 2018년 초부터 한반도 주변 공해에서 북한 선박이 수상한 배와 정유제품으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주고받는 이른바 ‘환적’(ship to ship transfer), 일본어로는 ‘세도리’(瀬取り) 방식의 밀수를 시도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기 이른다.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은 8월4일 폼페이오와 만나 “안보리 결의의 완전한 이행을 위해 환적 방식을 이용한 밀수 대책을 위해 협력”하기로 합의했고, 25일 전화 회담에선 “환적 밀수가 대북 제재의 커다란 구멍이 되고 있다”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래도 북한의 환적 밀수가 끊이지 않자, 외무성과 방위성은 8월31일 해상자위대가 촬영한 북한 선박의 환적 밀수 장면을 3분19초짜리 영상으로 만들어 유튜브를 통해 공개했다. 이 영상을 보면 북한 선적의 탱커 ‘유평5호’가 상하이 남남동 400㎞ 해상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소규모 선박과 호스를 통해 무엇인가를 주고받는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 이어, 해상자위대는 한반도 주변 해역의 정찰 강화에 나선다. 자위대의 활동 변화는 2018년 12월20일 동해에서 발생한 ‘해상자위대의 위협비행 및 한국 해군의 레이더 조준’ 사태라는 커다란 폭풍우를 불러오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문재인 대통령은 다시 한번 거대한 ‘외교적 모험’에 나섰다. 북-미 교착을 단숨에 무너뜨리기 위해 평양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3차 정상회담에 임한 것이다. 이 회담은 말 그대로 “남북회담이 북-미 회담을 촉진하고, 북-미 회담이 남북회담을 앞당기는 선순환을 위한 회담”(김의겸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었다. 그리고 남북 정상은 기대에 부응하듯 9·19 평양선언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와 관련된 중대 진전을 이뤄냈다. 북한이 새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데 꼭 필요한 시설인 “동창리 엔진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를 유관국 전문가들의 참관 아래 영구적으로 폐기”하고 “미국이 6·12 북-미 공동선언의 정신에 따라 상응 조처를 위하면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추가적 조처를 계속 취해 나갈 용의가 있다”고 밝힌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3차 정상회담 직후 서울에서 진행한 대국민 보고를 통해 김 위원장이 “가능한 한 빠른 시기에 완전한 비핵화를 끝내고 경제발전에 집중하고 싶다는 희망을 밝혔다”고 말했다.

그 직전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으로 방문한 백두산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천지를 내려다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이 천지 물에 붓을 담가서 북남 관계에서 새로운 역사를 우리가 계속 써 나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번에 제가 (평양) 오면서 새로운 역사를 좀 썼죠. 평양 시민들 앞에서 연설도 다 하고.”

이번에도 일본의 반응은 냉랭하기 이를 데 없었다. 스가 요시히데 당시 관방장관은 19일 정례 기자회견에서 “남북 정상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는 외교 수사를 사용했지만, 언론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아사히신문>마저 20일치 분석기사에서 정부 내에서 “이번 회담을 통해 비핵화보다 남북 융화가 앞서가면 일-미-한 공동보조가 흐트러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고 전했다.

이제 남은 초미의 관심사는 북한이 영변을 대가로 미국에 요구하게 될 ‘상응 조처’가 무엇일지였다. 그 해답은 머잖아 유엔 총회에 참석하게 될 리용호 외무상이 가져올 터였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잠복해 있던 핵심 갈등 요인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국 대법원의 강제노동 피해자 배상 판결이 다음달 말(10월30일)로 다가온 것이었다.

※ 9회에선 북·미의 대립이 이어지는 가운데 폭발한 대법원 판결 문제를 다룹니다.

길윤형 | 통일외교팀 기자.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초년 기자 시절부터 강제동원 피해 문제와 한-일 관계에 관심을 갖고 여러 기사를 써왔다. 2013년 가을부터 2017년 봄까지 <한겨레> 도쿄특파원으로 근무하며 아베 정권이 추진해온 다양한 정책을 가까이서 살펴봤다.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아베는 누구인가>, <26일 동안의 광복> 등을 썼고, <나는 날조 기자가 아니다>, <아베 삼대>를 번역했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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