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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봉현의 저널리즘책무실] 그래, 혁신기업이었어

등록 2020-10-20 17:05수정 2021-10-15 11:25

<한겨레> 창간 초기에 세계적으로 독특한 국민주 신문을 취재하려 외국 기자들이 한겨레신문사를 자주 방문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겨레> 창간 초기에 세계적으로 독특한 국민주 신문을 취재하려 외국 기자들이 한겨레신문사를 자주 방문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봉현 ㅣ 저널리즘책무실장 (언론학 박사)

지난주 정태기 전 한겨레신문사 사장의 회사장이 치러졌다. 고인을 추억하며 한겨레 구성원은 희미해진 기억을 살려냈다. 바로 한겨레가 ‘혁신기업’이었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애플, 구글, 알리바바처럼 한 세대 전 한겨레의 탄생은 내용과 형식에서 한국 언론의 혁신이었다. 변화는 점진적이기보다는 파괴적이었고, 그 복판에 송건호, 리영희, 정태기 같은 당대의 혁신가가 있었다. 창간 과정을 함께한 선임기자 정의길은 부고 기사에서 ‘혁신적 발상으로 ‘국민주 신문’ 창간 이끈 ‘민주언론 CEO’’(10.13)라고 고인을 기렸다.

혁신기업은 소비자의 절실한 필요를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구현하고, 생활양식과 문화를 바꾼다. 언론이 군사정권과 야합하던 시절 민주, 민중, 민족통일을 지향하는 새 언론은 절실했다. 지금은 크라우드펀딩이 익숙하지만 1987년 당시 국민주로 창간기금을 모집한다는 아이디어는 절묘했다. 납 활자를 뽑아 신문을 제작하기에, 숙련된 인력, 거대한 설비, 넓은 공간의 신문사를 세우는 데 최소 200억원, 최대 2천억원이 든다고 할 때였다. 그런데 이를 국민이 1차로 모아준 50억원으로 해결했다. 국내에서 누구도 해본 일이 없는 컴퓨터조판시스템(CTS)을 적용해 가능했다.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아이비엠은 일본신문용 프로그램을 한글화하는 비용으로 200억원을 제시했다. 이를 일본의 한 벤처기업과 함께 소형 컴퓨터와 32비트 워크스테이션을 여러 대 이어붙이는 방식으로 슈퍼컴퓨터화해 15억원에 해결했다.(30주년 사사 <진실의 창, 평화의 벗>) 가로쓰기 교과서로 배운 세대가 50살을 넘겼는데도 여전히 신문은 세로쓰기를 고집할 때, 과감히 순한글 가로쓰기를 도입해 지금의 표준을 만들었다. 기자의 촌지 수수가 공공연하던 때 윤리강령과 취재보도준칙을 처음 제정해 실천한 것도 한국 언론의 탁류에서 한겨레가 한줄기 샘물이 된 문화혁신이었다.

30년이 더 지난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졌다. 종이신문 독자는 디지털로 옮겨갔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누구나 전문가인 시대, 한겨레에 대한 한국 사회의 시선과 요구도 달라졌다. 김형배 한겨레 사우회장은 추도사에서 “(고인이 이루려던) 공정하고 품격 있는 언론, 균형감 있고 책임감 있는 언론이 시대적 과제가 됐다”며 한겨레 구성원의 집단지성과 적극적 실천을 주문했다. ‘파괴적 혁신’을 개념화한 미국의 경영학자 클레이턴 크리스턴슨은 한때의 혁신기업이 성공의 관성 때문에 시장을 지키는 데 급급해 도태되는 것을 ‘혁신기업의 딜레마’라 했다. 도전자 한겨레는 이제 수비적 혁신으로 내몰리는 상황이 됐다.

그렇다고 한겨레가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14년 ‘혁신 3.0’이란 전략을 통해 미국 <뉴욕 타임스> 식의 디지털 혁신을 추진하는 등 몇년간 다양한 혁신 프로그램을 가동해왔다. 내용과 기술 모두 만족스러운 콘텐츠를 통해 독자의 신뢰를 얻으면 한겨레 브랜드 가치가 커지고, 이는 구독, 후원, 광고 증대로 이어질 것이란 기대를 담은 전략이었다. 노력의 성과가 없지 않았지만, 혁신이라 하기엔 조직과 문화의 변화는 더뎠다. 디지털이 중요하다고 다들 말하면서 종이신문은 여전히 한겨레 콘텐츠의 ‘거푸집’ 기능을 하고 있다. 시행착오가 누적되면서 개혁 피로감도 커지는 모습이다.

하지만 한겨레에 혁신의 디엔에이가 있다면 30여년 전 그랬듯 길이 없는 곳에서 한 발 더 내딛는 담대함이라고 생각해본다. 고 정태기 전 사장은 <노자도덕경>에 나오는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란 글귀를 사무실에 걸어놓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한다. “공을 이루었으나 연연하지 않는다”는 이 말은 한겨레에 안주하지 않는 혁신을 채근한다. 이 가을 한겨레는 다시 한번 혁신의 신발 끈을 매고 있다. 독자와 주주의 후원을 늘려 디지털 시대 안정적 수익기반을 마련하는 비즈니스 모델 구축과 이에 걸맞은 콘텐츠 개편이 그것이다. 독자의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이런 시도가 성공해 한국 언론의 변화로 이어지는 기폭제가 되길 기대한다.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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