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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통신원 칼럼] 피노체트 유령의 수렴청정 / 김순배

등록 2020-10-15 17:42수정 2020-11-19 19:53

김순배 ㅣ 칠레센트랄대학교 비교한국학연구소장

이틀 뒤면 딱 1년이다. 시위대가 수도 산티아고 지하철에 불을 질렀다. 그렇게 타오른 칠레 역사상 최대 시위는 석달 넘게 이어졌다. 지금 칠레는 시위 1년을 앞둔 긴장 속에, 새 헌법 제정의 찬반과 제정기구의 구성 방식을 묻는 10월25일 국민투표에 관한 논의가 한창이다. 영주권자인 나는 투표하러 갈지 아직 고민이다. 하루에 코로나19 신규 확진자가 1500명, 사망자는 30명을 오르내리고 있어서다. 그런데 칠레인들은 투표하겠다는 사람이 80%에 이른다. 그만큼, “칠레는 깨어났다”고 외쳤던 저항의 성과인 새 헌법을 통해서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갈망한다.

지독한 사회불평등 속 물가상승으로 폭발한 뒤, 칠레인들은 최저임금 인상 등의 정책에 만족하지 않고 국가의 대원칙을 뜯어고치자고 요구했다. “1973=2019”라는 구호는 피노체트 군사독재 유산의 청산을 겨냥했다. 아옌데 사회주의 정부를 1973년 쿠데타로 무너뜨린 피노체트가 1980년에 만든 헌법에 뿌리박은 신자유주의적 모델을 갈아엎자고 요구했다. 특히 3장 헌법적 권리와 의무에서, 국가의 역할은 기본권 보장이 아니라 선택의 자유를 보호하는 데 맞춰져 있다. 결국 교육, 의료, 연금 등 기본권조차 시장에 맡겨졌다. 건강보험이 공공보험과 비싼 민간보험으로 나뉘고, 공공보험 가입자는 열악한 공공병원에서 진료받는 게 현실이다.

칠레는 1988년 국민투표에서 피노체트의 연임에 반대했다. 다음해 12월 아일윈 대통령이 선출되며 군사독재가 형식상 끝났다. 하지만 피노체트 세력에 휘둘리는 후견민주주의, 보호민주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피노체트는 대통령에서 물러났지만, 1998년까지 육군 참모총장으로 건재했고, 2002년까지 종신 상원의원으로 군림했다. 현 피녜라 대통령은 피노체트를 잇는 우파 민주독립연합(UDI)과 연립정부를 꾸리고 있다.

2005년 대통령 임기 단축 등 일부 개정됐지만, 민주화 세력은 기대한 변화를 이루지 못했다. ‘정치 엘리트와 국민들의 이혼’이라 불릴 만큼 실망은 컸다. 피노체트 헌법이 채워놓은 조항별 높은 정족수의 족쇄와 정치변화를 어렵게 만든 선거구제 때문에 신자유주의 모델을 바로잡지 못했다. 그 탓에,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도, 자유시장경제에 맡긴 권력을 되찾는 경제민주화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니 칠레는 신자유주의 실험실로 불리며 2006년 죽은 피노체트의 유령이 지금껏 수렴청정을 했던 셈이다. 지하철 요금 30페소 인상이 아니라 민주화 뒤 30년이 문제라고 지적한 이유다. 그래서 국민의 70% 안팎이 새 헌법 제정에 찬성한다. 그 주체를 국회의원이 50% 참여하는 구성이 아니라 100% 새로 뽑는 제헌위원에게 맡기려는 것도, 좌우를 떠나 정치 엘리트에 대한 깊은 불신을 나타낸다. 이번 국민투표 뒤 내년 4월 제헌위원을 선출해 새 헌법의 초안을 만든 다음, 국민이 다시 투표로 승인을 결정한다.

새 헌법에 담길 정신은 분명하다. 시위대는 고문에 희생된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의 ‘평화롭게 살아갈 권리’를 노래 불렀다. 빈촌과 부촌을 나누는 분기점이자 시위의 중심이던 이탈리아 광장은 ‘존엄의 광장’으로 이름 붙였다. 고단한 일상이 새 헌법 아래서 얼마나 평화롭고 존엄해지느냐는 칠레인들의 손에 달렸다. 헌법에 의료, 교육 등 존엄한 기본권 보장이 국가의 책임임을 강조하더라도, 그 정신이 정책으로 구현되도록 이끌어가는 것은 그들의 몫이다. 지금 칠레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를 향한 큰 걸음을 내디뎠다.

같은 숙제가 남은 한국은 87년 체제의 한계를 넘는 ‘제2의 민주화’를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지금껏 어떤 유령에 붙잡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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