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려 들지 마. 내가 편들고 싶으니 편드는 거야.” 대중만이 아니라 일부 지식인까지 이 경향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면서, 이제 ‘옳고 그름’은 ‘좋고 싫음’으로 대체된다. 예술사회학자 이라영은 이 멘탈리티를 “나는 알기 싫다, 고로 혐오한다”라는 문장으로 간명히 요약한 바 있다.
박권일 l 사회비평가
‘부족(tribe)의 시대’라고 한다. 이제 사람들은 국가, 민족, 정당이 아니라 각자의 부족 속에서 소속감을 확인하고, 부족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시간과 열정을 바친다. 작가 에이미 추아는 <정치적 부족주의>에서, 미국이 부족주의에 무지했던 탓에 외교적·정치적 실패를 거듭하며 위기에 처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부족 본능’을 잘 이용해 권력을 잡은 대표적 인물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초지일관 미국중심주의적 시각을 고수하는 이 책의 결론은 단순하다. 미국의 건국신화, 즉 인종·종교가 아닌 공동선을 추구하는 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학자 미셸 마페졸리는 30여년 전 <부족의 시대>를 출간해, 현대사회가 부족의 시대로 돌아가는 중이라 진단했다. 근대가 ‘민족’의 시대이자 ‘개인’의 시대였다면, 포스트모던 사회는 다양한 관심사에 따라 불규칙적으로 재편되는 소집단, 즉 새로운 부족들의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에이미 추아와 달리 마페졸리는 부족주의를 인간의 본성과 활력을 회복하는 계기로서 긍정한다. “지나치게 합리화된 우리 사회, 그렇기에 살균된 사회, 필사적으로 모든 위험을 막아내려는 사회, 바로 그러한 사회 속으로 야만스러운 것이 되돌아온다. 바로 그것이 부족주의의 의미다.”
미디어 연구자로서 퍼뜩 든 느낌은, 부족주의라는 말이 한국의 공론장에 ‘지나치게’ 잘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정치인의 말부터 그렇다. 이들은 유권자 또는 전체 시민을 대상으로 발언한다기보다 지지자를 향해 메시지를 던진다. 이에 대해 기자나 논평가가 저널리즘의 전통적 기능, 즉 비판을 하면 순식간에 ‘좌표가 찍’힌다. “기레기” “기더기” 같은 모욕은 기본이고 여성 기자일 경우 끔찍한 언어 성폭력이 가해진다. 한편, 낯 뜨거운 칭송과 무조건적 격려에는 “참언론” “참기자”의 월계관이 수여된다.
‘부족의 언어’는 우리 편의 절대적 정당성과 선의를 전제한다. 그래서 ‘내로남불’ 행태와 일방적 편들기로 귀결하곤 한다. 이정현 전 새누리당 대표는 한나라당 부대변인이던 2005년, 농민 시위에 참석했다가 사망한 전용철·홍덕표씨에 대해 “진압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면 대통령은 즉각 사과하고 충분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강력히 규탄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 시기인 2016년 사망한 농민 백남기씨에 대해선 입을 꾹 다물었다. 민주당이나 지지자들도 그리 다르지 않다. 문재인 정권의 “어용 지식인”을 자임한 유시민씨를 비판한 기사(‘유시민 팩트 틀렸나’ 조국 대리시험·국보법 파동 발언 논란, <아시아경제>)에 달린 ‘베스트 댓글’은 다음과 같았다. “사람이 틀릴 수도 있는 거지. 하지만 우린 유시민을 믿고 지지한다. 왜냐면 유시민은 틀릴 수는 있지만 절대 속이지는 않는다는 걸 우리는 아니까.”
부족 시대의 원시인에게도 정당성에 대한 최소한의 감각은 있었지만 진리로서 숙고되지는 못했다. 진리를 향한 열정은 도시국가에서 또렷해지다가 계몽주의 시대에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계몽 이후’인 21세기에, 왜 부족주의가 돌아오고 있는가? 대중이 원시인처럼 무지해서일 리는 없다. 전문가들이 대중을 좇기 바쁜, 이른바 ‘대중지성의 시대’ 아닌가.
결론부터 말하면,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알 수 있음에도 알려 하지 않는 것이다. 사태의 다양한 측면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볼수록 대상과의 동일시-일체감에서 오는 쾌락은 급격히 줄어든다. 효능감을 극대화하는 건 ‘철저한 무지’도 ‘치열한 앎’도 아닌, ‘선택적 무지’다. “가르치려 들지 마. 내가 편들고 싶으니 편드는 거야.” 대중만이 아니라 일부 지식인까지 이 경향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면서, 이제 ‘옳고 그름’은 ‘좋고 싫음’으로 대체된다. 예술사회학자 이라영은 이 멘탈리티를 “나는 알기 싫다, 고로 혐오한다”라는 문장으로 간명히 요약한 바 있다.
마페졸리가 말했듯 부족주의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한편으로 그것은 연민과 사랑의 원천이 되어 차가운 공리주의, 효율지상주의적 사고를 극복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애당초 부족주의는 ‘국가의 시대’(내셔널리즘)와 ‘시장의 시대’(글로벌리즘)에 대한 환멸과 피로가 만들어낸 반작용이기도 하다. 부족의 언어가 단지 반지성주의로 귀결할지, 아니면 정의로운 연대와 새로운 통합을 요청하는 ‘공감의 언어’로 전화할지는 우리의 성찰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