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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경제적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 / 김회승

등록 2020-10-13 16:06수정 2020-10-14 02:42

김회승 ㅣ 논설위원

“조기 재정 긴축은 경기 회복을 더디게 하고 미래에 더 큰 재정 비용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정책결정자들은 위험을 관리하기 위해 유연하게 재정을 확장해야 한다.”

얼마 전 발표된 국제통화기금(IMF) 재정국장의 보고서다. 구체적인 정책과 우선순위도 제안한다. 코로나 이후 증가하는 빈곤과 불평등에 대처할 것, 보건시스템·사회안전망·디지털화에 투자할 것, 보건과 교육에 대한 보편적 접근을 위해 지출할 것 등의 차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세계은행(WB) 등 다른 국제기구의 컨센서스, 그리고 주요국의 대응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전세계가 코로나 대응에 쏟아부은 돈은 11조달러로 추산된다. 우리 돈으로 1경원이 훌쩍 넘는다. 올해 상반기 전망치니 하반기엔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국내총생산 대비 재정적자와 국가채무는 ‘2차대전 이후 최대치’다. 올해 37개 오이시디 회원국 평균 재정적자는 연초 -3.0%에서 -13.6%로, 국가부채비율은 109%에서 137%로 각각 급증할 것으로 전망된다.

우리는 어떤가? 올해 재정적자는 -6.1%로 애초 계획(본예산)보다 2.6%포인트 커졌다. 국가채무비율도 43.9%로 4.1%포인트 증가했다. 천문학적인 재정을 쏟아붓는 나라들에 견주면 시쳇말로 새발의 피다. 내년 예산안도 올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내년 국가채무는 46.7%로 2.8%포인트 늘어나고, 재정적자는 올해보다 줄게(-5.4%) 짰다. 지출 규모도 네 차례 추경을 포함한 것보다 고작 1.6%, 9조원가량 늘리는 데 그쳤다. 이래놓고 확장 재정이니, 슈퍼 예산이니 떠드는 모양새가 의아할 뿐이다.

코로나 이후 영업부진으로 폐점을 추진 중인 홈플러스 대전 둔삼점 직원들이 7일 매장 앞에서 폐점매각 반대 결의대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코로나 이후 영업부진으로 폐점을 추진 중인 홈플러스 대전 둔삼점 직원들이 7일 매장 앞에서 폐점매각 반대 결의대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재정정책에 정답은 없다. 나라마다 처지껏 하는 것이다. 중요한 건 무엇을 위해 쓰느냐다. 아이슬란드 정부는 2008년 금융위기 때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국가채무비율은 1년 만에 29%에서 95%로 뛰었다. 피 같은 돈이 가장 먼저 닿은 곳은 사회안전망이었다. 의료와 교육 지출도 이전보다 더 늘렸다. 재정이 어렵다며 긴축을 선택한 다른 유럽국에선 실업률·빈곤율·자살률이 급상승했지만, 아이슬란드는 예외였다. 위기 상황에서 사회적 약자를 구제하는 것을 최우선 정책 목표로 삼은 결과다. 국민의 ‘경제적 존엄성’을 지키는 선택을 한 것이다.

위기 상황에서 한 나라의 민주주의 역량은, 정책결정자들이 선택하는 경제정책을 통해 드러난다. 우리의 정책결정자들은 어떤가. 말로는 재난 상황의 직격탄은 약자들에게 닥친다 우려하지만, 정작 국가가 돕겠다고 나서면 안색이 달라진다. 투입 대비 효과가 적다, 도덕적 해이가 우려된다며 딴지를 건다. 긴급구제 차원의 생계비를 지원한다는데, 한계소비성향이니 재정승수니 하는 어려운 경제학 산식을 들고선 효율성을 따진다. 재정이 부족해 빚을 늘리겠다고 하면 “미래세대의 부담을 키운다”며 손사래를 친다. 세금을 더 내자는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는다. 위기 상황에서 국가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와 다를 바 없다.

국가의 노력은 ‘선한 정책의 나쁜 결과’로 폄하한다. 임대료를 제멋대로 올리지 못하게 하고, 부동산·주식 부자에게 세금을 더 물리자는 건 시장 원리에 반한다고 엄히 꾸짖는다. 약자에게 불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겠다 하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약자한테 돌아갈 것이라고 공공연히 협박한다. 결국 강자의 손실을 약자에게 전가하는 행위가 정상적인 시장 원리로 둔갑한다. 그러면 대안은? 규제를 완화해서 기업들이 돈을 많이 벌게 하면 된다는 이야기다. 수십년째 근거도 부실하고 영혼도 없는 훈장질이다.

경제위기 극복은 대체로 구제(Relief)-회복(Recover)-개혁(Reform)의 과정을 거친다. 지금 세계는 구제와 회복의 중간쯤 어딘가에 있다. 구제는 경제 효과를 따지는 투자 행위가 아니다. 그래서 핵심은 효율성이 아니라 신속성이다. 아이엠에프조차 빚을 내서라도 불평등과 빈곤 악화를 최소화하는 데 국가가 신속히 나설 것을 주문하는 이유다. 돈 아까운 줄 몰라서가 아니라, 당장 국민의 삶을 지키는 게 그만큼 절박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의회 권력은 나은 편이다. 민심에 귀 기울일 자세라도 돼 있으니 말이다. 국가 정책을 입안하는 관료, 이들에게 조언하는 전문가, 정책을 논평하는 언론과 법적 판단을 하는 사법부까지, 이들 ‘선출되지 않는 결정자’ 대부분은 코로나 위기의 무풍지대에서 산다. 생존 위기에 몰린 약자들의 경제적 존엄성을 과연 얼마나 절감하고 있을까.

hon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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