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배 ㅣ 논설위원
한국조세연구원에 ‘재정’이 덧붙어 한국조세재정연구원으로 바뀐 건 2013년 7월이었다. 세제 중심으로 이뤄진 연구 분야가 넓어진 걸 반영한 변화였다.
1992년 설립 뒤 30년 가까운 연륜을 쌓고, 박사급 연구 인력만 43명(원장 제외)이나 확보하고 있는 이 조세·재정 전문기관에 ‘얼빠진 기관’이란 험악한 딱지가 붙은 실마리는 8쪽짜리 짤막한 보고서였다. ‘지역화폐의 도입이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9월15일)이다. 지역화폐 발행에 따른 지역경제 활성화나 고용 증대 효과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게 보고서의 요지다.
기본소득, 기본주택과 함께 지역화폐를 대표 정책 브랜드로 갖고 있는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근거 없이 정부 정책을 때리는 얼빠진 국책연구기관”이라는 걸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지 “적폐”와 “철밥통”이라는 말까지 쏟아내 보고서를 정치권 안팎의 쟁점으로 만들어놓았다. 대선 후보 지지율 선두권인 그의 격한 발언은 ‘분노조절 장애’ ‘분서갱유’ ‘그릇 작다’ ‘식견 얕다’는 비판과 조롱을 불러왔다.
조세니 재정이니 하는 건조한 주제를 연구하는 조세연의 28년 역사에서 이 정도로 세간의 화제에 오르내린 보고서도 흔치 않았을 것 같다. 요약본에 이어 10월에 나온다는 80~90쪽짜리 정식 보고서의 열독률이 덩달아 높아지겠다.
싱크탱크의 보고서 또한 많이 읽히고 정책에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것일 테니, 조세연은 일단 이 지사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 일이다. “정부 정책 훼손하는 국책연구기관에 대해 엄중 문책이 있어야 한다”는 위협을 당하고 “국민 세금으로 국민들 고통을 주는 결과물을 내는 철밥통” “청산해야 할 적폐”라는 ‘노이즈’에 귀가 따갑고 심장이 떨렸을지는 몰라도 ‘마케팅’은 잘된 것 아닌가.
이 지사의 목적이 그것은 아니었을 테고 연구자들의 입에 지퍼를 채우는 것이었다면, 일부나마 성공했다고 봐야겠다. 연구원 실무진에서 반박 자료를 준비해 배포하려다가 원장을 비롯한 윗선의 만류로 접었다고 하니 말이다.
이전 연구에서도 지역화폐의 경제 활성화나 고용 효과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한 예는 여럿 있었다. 올 3월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에 제출된 한국재정학회 보고서(‘지역화폐가 지역의 고용에 미치는 효과’)가 그중 하나다. 이 지사는 “‘합리적인 재정학회의 연구’와 ‘불합리한 조세연 연구’”라 했는데, 두 연구는 결론이 비슷할 뿐 아니라 서로 긴밀히 얽혀 있다. 조세연의 연구는 중간 보고서 형태로 재정학회에 제공돼 주요 참고 자료로 활용된 선행 사례였다. 재정학회 보고서에는 ‘조세연의 해당 보고서를 제외한 대부분의 선행 연구들에서 정책적으로 중요한 순경제효과를 계산하지 않아 효과를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는 대목까지 들어 있다.
지역화폐는 인적, 물적 자원을 지역 안에서 돌도록 함으로써 영세 상공인, 자영업자를 돕고 지역 안에서 일자리를 창출하자는 목적이다. 이런 좋은 의미 속에 이미 한계가 아울러 들어 있다. 어느 특정 지역에 한정되지 않고 너나없이 지역화폐 발행에 나설 경우 곳곳에 담장이 만들어지고 전반적인 경제 활동의 공간이 좁아져 이른바 ‘구성의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좁게는 성남시, 나아가 경기도에 좋다고 곧 대한민국에도 좋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역화폐의 이런 한계를 들어 곧장 발행을 끊거나 줄여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가는 건 물론 온당치 않다. 이 지사의 말처럼 “고용 증대 효과나 국가 소비 총량 증대 효과는 없을 수 있지만, 유통 재벌에게서 중소자영업자로 소비를 이전하는 효과”는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 단위의 경제적 효율성 못지않게 골목상권을 지키자는 가치 또한 소중하다. 무역장벽을 낮출 때도 농민, 농촌, 농업을 고려하지 않는가.
다만, 정책의 균형점을 찾는 노력은 이어져야 할 것이다. 지역화폐는 현재 전국 곳곳에서 발행되고 있으며, 여기엔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금이 들어간다. 2016년 53개 지자체 1168억원이던 지역화폐 발행 규모가 2020년 229개 지자체 9조원(계획)으로 늘었고, 내년엔 15조원까지 불어날 예정인데, 10% 할인 발행 방식에서 8%포인트는 국고 부담이다. 지역 현안만은 아닌 것이다. 국가 단위의 경제 전반에 끼치는 영향까지 다각도로 따져보는 일이 필요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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