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선희 ㅣ 경제부장
지난 2일 확정된 국민의힘 정강정책 중 정책부문은 10대 기본정책, 33개 하위항목으로 이뤄져 있다.
“국가는 국민 개인이 기본소득을 통해 안정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도록 적극적으로 뒷받침하여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비한다.” 첫번째 정책 ‘모두에게 열린 기회의 나라’ 아래 첫 항목이다.
조금 더 내려가면 세번째 정책 ‘약자와의 동행, 경제민주화 구현’이 나온다. “시장에 참여하는 모든 경제주체 간의 불공정 행위를 엄중 처벌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동반성장과 조화를 이루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기본소득은 진보정책 중에서도 급진적으로 평가되는 정책이다. “오늘날 사회복지 프로그램계의 ‘잇 아이템’”(경제학자 아비지트 바네르지)이기도 하다. 경제민주화 역시 더불어민주당 정강정책에도 들어 있는 대표적인 진보 어젠다 중 하나다.
국민의힘이 두 정책을 정강정책에 포함시키자 ‘파격적이다’ ‘당이 변하고 있다’ 등의 평가가 쏟아졌다. 국민의힘은 단숨에 ‘수구정당’ ‘기득권 보수’의 이미지를 벗고 ‘시대에 발맞추는 정당’ ‘합리적 중도보수’ 이미지를 얻는 데 성공하는 듯 보였다. 진보 의제를 국민의힘에 선점당하고 있다는 우려까지 등장했다.
어디서 본 듯 낯익은 풍경이다.
알려져 있듯 우리나라 보수정당이 경제민주화를 정강정책에 넣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은 경제민주화의 ‘원조’라고 회자되는 김종인(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씨를 영입하고, 경제민주화를 새로 출범시킨 새누리당의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는 새누리당이 이미지를 바꾸고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거기까지였다. 박근혜 정권은 출범 뒤 경제민주화에 등을 돌리고 ‘창조경제’로 갈아탔다. 김 위원장은 회고록(<영원한 권력은 없다>)에서 자신은 “박근혜 정부가 태어날 수 있도록 했던 일”에 대해 국민 앞에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엔 다를까.
윤희숙 의원이 위원장으로 있는 국민의힘 경제혁신위원회는 지난달 20일 혁신아젠다포럼, 지난 10일 활동 보고회를 열어 자신들의 기본소득 방안을 발표했다. 중위소득의 50%(1인 가구 88만원, 4인 가구 237만원 등)를 기준으로, 소득이 그 이하인 가구(328만5천가구, 610만명)에 정부가 소득 지원을 하겠다는 것이 골자다. 기본소득은 아무 조건이나 기준 없이 사회의 모든 개인들에게 일정액을 지급하자는 게 핵심이다. 국민의힘 안은 기본소득이라기보다 저소득층 지원 확대책에 가깝다. “어떻게 해도 기본소득이라 부를 수 없는 선별적 복지의 재탕을 기본소득이라고 칭하고 있다”(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지난달 말 국무회의를 통과해 국회에 제출된 이른바 ‘공정경제 3법’(상법, 공정거래법, 금융그룹감독법) 제·개정안은 대기업의 경영투명성 제고 방안, 일감 몰아주기 규제 등을 담고 있어 경제민주화를 진전시킬 수 있는 법안들로 평가받는다. 김종인 위원장 역시 원칙적 찬성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국민의힘 내부에서 반대 의견이 잇달아 터져 나오면서 김 위원장의 입장이 관철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감이 커지고 있다. 소관 상임위인 국회 정무위원회와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의원 14명 가운데 20일 <한겨레>에 입장을 밝힌 11명 중 9명이 유보나 반대 입장을 내놨다.
김종인 위원장은 “후퇴하지 않을 변화와 혁신의 디엔에이(DNA)를 당에 심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본소득이라는 포장만 이용할 뿐 동떨어진 내용을 내놓는 것을 보면, 굳이 경제민주화 조항을 부활시켜 놓고 다시 재벌의 편에 기우는 모습을 보면, 당내에 새 정강정책에 대해 어느 정도의 공감대가 있는 것인지, 실제 구체적 정책을 통해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김 위원장이 박근혜 정권의 경제민주화를 놓고 “그저 당선을 위한 구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장식용 외피에 불과했다”고 말한 것처럼, 이번에도 실질적 변화 없이 ‘혁신’의 이미지만 누리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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