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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검찰개혁 물 건너가나 / 이춘재

등록 2020-09-14 18:21수정 2020-09-15 10:28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청사. 연합뉴스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청사. 연합뉴스

“검사는 소추와 공소 유지를 담당하는 당사자로서의 지위 외에도 공익의 대표자로서의 지위에서 피고인의 정당한 이익을 옹호해야 할 의무도 지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에 구현된 검사의 소임을 이렇게 정리했다.(94헌마60결정) 검사는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범죄자는 반드시 처벌받도록 해야 하지만, 억울한 사람은 그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다시 말해, 죄가 되면 기소하고 죄가 안 되면 그냥 수사를 끝내야 한다. 검사를 공익의 대변자(대표자)라 거창하게 부르는 이유다. 하지만 그동안 검찰은 이런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공익을 대변하기보다 정치권력과 재벌, 그리고 검찰 조직을 지키는 데 더 힘썼다. ‘봐주기 수사’ ‘표적 수사’라는 말이 익숙하고, 진보와 보수 정권 가릴 것 없이 검찰개혁을 주요 국정과제로 삼은 것이 이를 방증한다. 박근혜 정부 말기에 촛불을 든 시민들은 무엇보다 검찰개혁을 먼저 요구했다. 검찰을 검찰답게 만들어 달라는 주권자의 정당한 요구였다. 따라서 ‘촛불정부’를 자임하는 문재인 정부가 검찰개혁에 ‘올인’하다시피 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현 정부의 검찰개혁은 지금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지난해 조국 사태 때 목격했던 검찰과, 지금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 관련 수사를 하고 있는 검찰은 같은 정부의 검찰로 보기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마치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 평행선상에 위치한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평행우주론’을 체험하는 것 같다. 100여명의 특수부 검사와 수사관을 투입하고 무려 70여곳을 압수수색한 조국 전 장관 가족에 대한 수사는 검찰권 남용 논란을 낳았다. 당시 수사팀은 사모펀드를 둘러싼 거대한 권력형 범죄인 것처럼 소란을 피웠지만, 지금 남은 것은 ‘입시용 스펙’의 진위 여부다. 죄가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가리지 않고 탈탈 털다시피 한 결과다. 그렇다고 추 장관 아들 관련 수사를 검찰개혁의 전범으로 볼 수도 없다. 군대 휴가 규정 위반 여부를 따지는 간단한 사건인데도 검찰은 무려 8개월이나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정치적 이슈로 비화돼 온 나라가 시끄러워지자 지난 13일 추 장관 아들을 소환조사하는 등 뒤늦게 움직이고 있다. 정권의 입맛에 맞게 수사 속도와 결과를 조절하는 모습은 과거 정치검찰의 전매특허였다.

문재인 정부의 검찰개혁이 권력 눈치나 살피며 수사를 질질 끄는 검찰을 만들겠다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촛불 시민들은 똑 부러진 수사로 똑 부러진 결과를 내놓는 검찰을 만들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죄가 되면 되는 대로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당당하게 수사 결과를 내놓는 검찰을 원했다. 하지만 추 장관이 취임 8개월 동안 4차례 인사를 통해 세팅한 검찰은 이와 한참 거리가 멀어 보인다. 어쩌면 현 정부의 검찰개혁은 첫 단추부터 잘못 채웠는지 모른다. ‘윤석열 사단’이 주도한 적폐청산은 무죄추정 원칙과 피의자 방어권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수사였다. 수사 대상자를 압박하기 위한 피의사실 공표도 노골적으로 이뤄졌다. 이로 인해 현직 검사를 비롯해 이전 정권에서 잘나갔던 이들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사법농단 수사 때는 양승태(전 대법원장) 체제에 순응했다는 이유로 판사 수십명이 줄줄이 검찰에 불려 갔다. 이들 중 일부는 ‘수사에 협조하지 않으면 피의자가 될 수 있다’는 취지의 압박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청와대는 ‘잘 드는 칼’에 취해 윤 사단의 폭주를 제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요청에 따라 인지부서(특수부) 기능을 더욱 확대했다. 검찰개혁에 역행한 것이다.

추 장관은 이를 반면교사로 삼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지금 검찰은 정권의 눈치를 보는 듯한 모습으로 또 다른 부작용을 낳고 있다. 추 장관은 검찰개혁을 누구보다 강조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메모를 읽어봤으면 한다. 노 전 대통령은 2003년 불법대선자금 수사 때 청와대 참모들과 여권 인사들의 공격으로부터 검찰을 감쌌다. 자신도 불만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가 남긴 메모에는 그의 검찰개혁 철학이 잘 담겨 있다. “검찰, 지켜주자. 그리고 바로 세우자.”

이춘재 ㅣ 사회부장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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