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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디지털 시대의 상실과 애도 / 정대건

등록 2020-09-11 17:23수정 2020-09-12 15:41

정대건 ㅣ 소설가·영화감독

2013년 즈음에 내가 즐겨 하던 란도(rando)라는 앱이 있었다. 원형으로 된 프레임에 사진을 찍으면 그 사진이 세계 어디론가 랜덤으로 전송되고, 한 장을 보내면 세계 어디에선가 사진을 한 장 받을 수 있는 앱이었다. 채팅을 할 수도 없고 사진이 찍힌 지역만 알 수 있는 단순한 기능이 전부였다. 북유럽 끝에서부터 중동, 아프리카, 남미까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지명에서 날아온 이국적인 풍경의 사진들(음식, 동물, 간판의 글씨 등등)을 보면 참 신기하고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기분이 들었다. 매일 어떤 사진을 받게 될지 두근거리고 설렜다.

그렇게 삶의 낙이 되어준 란도가 예고도 없이 갑자기 서비스를 중단했을 때, 그야말로 죽어버렸을 때, 나는 반려동물이 예고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큰 상실감을 느꼈다. 울적한 기분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란도를 잃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그 서비스를 사랑했는지 알게 되었다. 내 주변에 란도를 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나는 아무와도 슬픔을 나눌 수 없었다. 전세계에서 사진을 주고받던 란도 사용자들도 똑같은 심정이겠지 하고 상상할 뿐이었다.

디지털 시대를 사는 우리는 사람들과의 관계만큼, 혹은 그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디지털 서비스와 함께 보낸다. 영화 <그녀>에서 운영체제(OS)와 사랑에 빠진 주인공을 전 부인은 “당신이 진짜 감정을 감당하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며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란도를 잃고 무척이나 슬펐기에, 삶의 일부가 되어준 것에 애착을 가지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잃었을 때 상실감을 느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일상에서 사람들은 상실을 겪었을 때 장례와 같은 의식을 치른다. 함께했던 추억을 공유하고, 슬픔을 나누고, 서로를 위로하며 일상으로 돌아가는 절차와 애도의 문화가 있다. 그러나 나는 갑자기 서비스가 중단된 것에 대해서 전세계의 란도 사용자들과 게시판 같은 곳에 모여서 슬픔을 나누는 등의 애도의 과정을 함께 나누지 못했다.

얼마 전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서비스가 중단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영하 작가가 소개해주는 소설들과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자주 들었는데 이제는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니 슬펐다. 하지만 란도를 잃어버렸을 때만큼 울적하지는 않았다. ‘책 읽는 시간’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팟캐스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아쉬운 마음을 표현하는 댓글이 달렸다. 김영하 작가의 목소리가 불면의 밤에 얼마나 큰 위로가 되어주었는지, 산책을 하며, 논문을 쓰며 함께 시간을 보낸 팟캐스트에 대한 각자의 추억과 고마움의 말들이 오갔다. 상실감도 있었지만 그렇게 애정을 고백하고 경험을 나누는 것이 공감과 함께 위로가 되었다. 그러면서 란도 또한 이런 장이 마련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꽤 많은 디지털 서비스가 갑작스럽게 사라지거나 종료된다. 애정을 가지고 많은 시간을 플레이했지만 서비스가 종료된 온라인 게임들, 몇년간 열심히 쓴 다이어리 앱, 많은 사람들의 추억이 담겨 있는 싸이월드 등. 그렇게 애정을 가졌던 것이 사라져버리고 다시는 보거나 들을 수 없어졌을 때 우리는 저마다 상실을 경험하지만, 디지털 서비스에 대한 애도 문화가 없다는 이유로 적절하게 그 상실감을 공유하거나 위로를 주고받지도 못한다. 다이어리 앱에 몇년간 적어둔 소중한 기록들이 서비스 종료로 사라졌다는 사연이 그저 개인의 몫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제도적 차원뿐만 아니라 문화가 형성된다면 좋겠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쪽은 책임감을 가지고 서비스 종료를 미리 알리고 소중한 데이터를 백업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불가피하게 종료하게 되었을 때 해당 서비스에 대한 추억과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장을 제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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