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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메시지와 메신저

등록 2020-09-10 18:35수정 2020-09-11 02:37

소수자·약자가 고통을 호소할 때, 우리는 가능한 한 그 말을 과대평가할 필요가 있다. 발언 주체가 기득권층, 강자일 때 우리는 그 말을 가능한 한 과소평가해야 한다. 특권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평등을 고통으로 느끼기 쉽기 때문이다.

박권일 ㅣ 사회비평가

지난 7월7일 미국 <하퍼스 매거진>에 편지 하나가 실렸다. ‘정의와 열린 토론에 관한 편지’(A Letter on Justice and Open Debate)라는 제목의 이 글에 153명의 저명한 작가와 지식인이 서명했다. 편지는 최근의 이른바 ‘말소 문화’(Cancel Culture)에 문제를 제기하고,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말소 문화란 자신과 다른 의견을 과도하게 배척하거나 묵살하는 풍조로서, 종종 ‘정치적 올바름 문화’(PC Culture)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된다.

이 편지를 소개한 국내 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그래, 이런 얘기 나올 만도 하지’라고 생각했다. 꼬투리 하나 잡으면 사람을 완전히 매장할 기세로 물어뜯는 그런 문화가 한국 트위터나 페이스북에도 만연해 있다. 나는 유명한 작가는 아니지만 10년 넘게 소셜미디어에서 활동하며 부모 욕을 포함한 온갖 패륜적 모욕과 조롱을 받아왔다. 협박, 욕설, 외모 비하 정도는 그냥 일상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정의롭다는 확신에 차 있기에 린치를 가하면서도 일말의 죄의식조차 없었다.

그런데 뉘앙스가 아무래도 이상했다. 무엇보다 노엄 촘스키, 맬컴 글래드웰 등과 함께 언급된 서명자가 <해리 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이란 점이 못내 걸렸다. 롤링은 최근 성소수자 차별적 발언으로 뉴스에 자주 오르내렸다. 검색해보니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 누구나 수긍할 법한 온건한 메시지를 담은 그 글은 미국에서 엄청난 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편지가 나오게 된 직접적 계기는, <뉴욕 타임스> 사설 담당 편집장이 ‘인종차별 항의 시위에 군대를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톰 코튼 상원의원의 글을 실었다가 거센 항의를 받고 사임한 사건이었다. 이에 문제의식을 느낀 작가 토머스 채터턴 윌리엄스는 주변 지식인들과 함께 ‘행동’에 나섰고, 마침내 저명한 지식인 153명이 서명한 편지가 나오게 된다. 그러나 발표되자마자 ‘메시지’보다 ‘메신저’에 관심이 집중됐다. 서명 참여자 대부분이 부유한 백인 지식인들이라는 지적이었다. 요컨대 그 편지는 최근 미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에 대한 백인 지식인의 ‘백래시’ 아니냐는 것이다.

이런 비판에 맞서는 ‘편지’ 측의 알리바이는, 최초 주창자인 윌리엄스가 흑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윌리엄스는 편지의 초기 제안자들 중 유일한 흑인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흑인성’을 버리겠다는 책을 쓴 흑인이다. 흑인성을 포기한 그를 빼면 초기 제안자 전원이 백인 남성이었다.

최종 서명자 명단에는 전설적인 페미니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도 이름을 올렸다. 힐러리 클린턴 지지자인 그는 지난 대선 때 ‘젊은 여성들이 버니 샌더스를 지지하는 건 젊은 남성이 샌더스 쪽에 많기 때문’이라는 취지의 발언으로 많은 이들의 분노를 촉발한 바 있다. 세계적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도 서명했다. 그는 “과학계의 성별 격차는 차별보다 생물학적 차이에 기인한다”, “경찰이 흑인을 편중되게 죽이지는 않는다”, “경찰 총격 사건에서 인종에 초점을 맞추는 건 도움이 안 된다” 등의 발언으로 비판받아온 인물이다. 참여자들이 알려지면서 문제가 되자 트랜스젠더 인권 운동가 제니퍼 피니 보일런은 “다른 서명자들이 누군지 몰랐다”며 서명을 철회하기도 했다.

“메시지를 반박할 수 없으면 메신저를 공격하라”는 말이 있다. 상대 주장을 깎아내리는 고전적 수법이다. 기초 논리학 수업에 항상 등장하는 논리적 오류이기도 하다. 편지 논란도 그런 사례로 봐야 할까? 즉 ‘말소 문화’ 찬동자들이 합리적 비판을 틀어막기 위해 인신공격을 가한 사건일까?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사회문제에서 옳고 그름은 형식논리라는 진공상태에서만 판단될 수 없다. 메시지는 언제나 맥락 의존적이며 맥락의 결정적 요소는 권력관계다. 같은 이야기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소수자·약자가 고통을 호소할 때, 우리는 가능한 한 그 말을 과대평가할 필요가 있다. 이 집단의 발언은 구조적으로 억압되기 때문에 작은 비명조차도 차별과 억압이라는 거대한 빙산의 일각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 발언 주체가 기득권층, 강자일 때 우리는 그 말을 가능한 한 과소평가해야 한다. 특권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평등을 고통으로 느끼기 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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