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 초강경파인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왼쪽)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외교 책사’라 불렸던 야치 쇼타로 일본 국가안전보장국장. 볼턴 전 보좌관 트위터 갈무리
볼턴은 이 만남에 대해 “도쿄의 예측은 한국의 예측과 180도 달랐고, 짧게 말해 나와 매우 비슷”했다고 평했다. 볼턴이 트럼프의 깊은 신뢰를 얻고 있는 ‘아베의 일본’이란 우군을 만나게 된 것이다.
“트럼프-김정은 정상회담에 대해 내가 더 많이 알면 알게 될수록, 나는 이 회담에 대해 더 낙심하고 부정적이 됐다.”
지난 6월 말 큰 파문을 일으킨 회고록 <그 일이 일어난 방: 백악관 회고록>에서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지난 2년에 걸친 북-미 핵협상을 위와 같이 건조하고 음울한 문장과 함께 회상하고 있다. 볼턴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역대 미국 정부가 지난 20여년 동안 기울여온 여러 노력을 싸잡아 비난한 뒤, “김정은을 만나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열정에 대해서도 “골치 아팠다”(sick at heart)는 표현으로 냉소했다.
대북 초강경론자인 ‘네오콘’ 볼턴이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과 처음 마주한 것은 임명 22일째인 2018년 4월12일이었다. 이 회담에서 볼턴은 정 실장에게 그달 27일로 예정된 ‘판문점 회담’에서 한국이 “비핵화에 대한 구체적 논의를 피할 것”을 요구했다. “북이 남을 끌어당겨 한국과 미·일 사이의 이간질을 시도할까 우려”된다는 이유였지만, 미 행정부 내에서 북한에 요구할 ‘비핵화 방식’에 대한 충분한 의견 조율이 이뤄지지 못한 상황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미국은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4월1일 1차 방북을 통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비핵화 의지를 이제 막 ‘직접’ 확인한 상태였다. 그전까지 트럼프의 대북정책은 모든 옵션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최대한의 압박’을 통해 비핵화를 유도한다는 것뿐이었다. 대화가 시작됐으니 그에 따른 준비가 이뤄져야 했다.
정 실장이 백악관을 방문한 ‘바로 그날’ 볼턴을 찾아온 또 한명의 손님이 있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외교 책사’이자 12·28 합의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을 시도했던 야치 쇼타로 일본 국가안전보장국장이었다. 볼턴의 표현을 빌리자면, 야치는 “가능한 한 빨리 (북핵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전망을 얘기하고 싶어”했다. 트럼프의 갑작스러운 정상회담 수락으로 발생한 ‘외교적 시련’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이 혈안이 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딱딱하고 사무적인 분위기에서 끝났을 것으로 짐작되는 정의용-볼턴 회담과 달리, 볼턴-야치 회담에선 향후 북-미 핵협상의 방향을 사실상 결정하는 ‘놀라운 화학작용’이 발생했다. 야치는 볼턴에게 “핵을 갖겠다는 북한의 결심은 확정된 것이어서 이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에 가까워지고 있다”며, 일본은 조지 부시 행정부가 2000년대 중반 6자회담 때 시도했던 ‘행동 대 행동’의 해법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행동 대 행동’ 원칙은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북한이 의미 있는 조처를 취하기 전에 경제적 이득을 허용해 정작 중요한 비핵화를 ‘영원히 지연시킨다’는 이유에서였다. 야치는 나아가 “트럼프 행정부 아래서 바로 (북한의 핵을) 해체하기 시작해 (비핵화에) 2년 이상 걸리지 않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그러자 볼턴은 자신이 주도했던 2004~2005년의 리비아 비핵화의 사례를 언급하며 “6~9개월이면 충분하다”고 화답했다. 볼턴은 야치가 “답변 대신 묘한 미소를 남겼다”고 적고 있다. 볼턴은 이 만남에 대해 “도쿄의 예측은 한국의 예측과 180도 달랐고, 짧게 말해 나와 매우 비슷”했다고 평했다. 볼턴이 트럼프의 깊은 신뢰를 얻고 있는 ‘아베의 일본’이란 우군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일주일 뒤엔 아베가 직접 나섰다. 아베는 4월17~18일 플로리다주에 있는 트럼프 대통령의 개인 별장 마러라고에서 “북한과 합의를 맺으려면 정말 실효성 있는 합의를 맺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나아가 북한이 핵뿐 아니라 모든 생물학·화학 무기도 없애야 하며,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은 물론 일본을 위협할 수 있는 중·단거리 탄도미사일도 포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이 사실상 받아들이기 힘든 ‘최대치의 요구’를 쏟아낸 것이다.
그로부터 열흘 뒤인 27일 남북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났다. 4·27 ‘판문점 선언’엔 미국의 요구대로 “남북이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한다는 선언적 문구만 포함됐다. 이제 미국이 나설 차례였다.
볼턴과 야치 사이에 북한의 비핵화 방식과 관련한 ‘구체적 합의’가 이뤄진 것은 5월4일이었다. 같은 날 이뤄진 정의용-볼턴 회담을 전하는 백악관 발표문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5월22일 방미 준비를 시작한다’는 실무적 내용이 담겨 있을 뿐이다. 하지만 같은 날 이뤄진 볼턴-야치 회담 결과를 전하는 발표문에는 두 인사가 북한의 모든 핵과 탄도미사일, 생물학·화학 무기, 나아가 관련된 모든 프로그램을 완전하고 영구적으로 해체한다는 공유된 목표를 재확인했다는 문장이 담겨 있다. 지나치게 결과론적인 해석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이듬해 2·28 ‘하노이의 비극’의 직접적 원인이 된 것으로 알려진 (트럼프가 김정은 위원장에게 건넨) ‘비핵화 정의 문서’의 내용이 이날 미-일 사이에 합의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2018년 5월4일을 북-미 핵협상의 비극적 운명이 사실상 결정된 ‘운명의 날’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볼턴-야치의 합의 내용이 언론에 공개된 것은 그로부터 9일 뒤인 5월13일이었다. 볼턴은 <에이비시>(ABC) 방송 인터뷰에서 “비핵화라는 것은 단순히 핵무기만을 말하지 않는다”며 “우리는 탄도미사일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있고, 화학·생물학 무기도 들여다볼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영구적이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란 “모든 핵무기를 없애고, 그것들을 해체해서 (미국의 핵시설인) 테네시주 오크리지로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미국이 북한의 핵·탄도미사일과 화학·생물학 무기를 대상으로 신속하고 공격적인 ‘빅딜’식 비핵화를 추진하겠다는 공개선언이었다. 볼턴의 ‘강경론’은 이후 북한과 직접 협상하는 국무부의 ‘현실론’과 대립하며 부침을 겪게 되지만, 결국 하노이 2차 정상회담까지 살아남아 핵협상을 파국으로 몰고 가게 된다.
사실상 ‘백기 투항’을 요구하는 볼턴의 요구에 북한은 동요했다. 사흘 뒤인 16일 김계관 당시 북 외무성 제1부상은 “볼턴을 비롯한 백악관과 국무성의 고위관리들은 ‘선 핵포기, 후 보상’ 등 (중략) 리비아 핵포기 방식 등의 주장을 쏟아내고 있다”며 “미국의 처사에 격분을 금할 수 없으며 미국이 진정 건전한 대화와 협상을 통해 조-미 관계 개선을 바라고 있는지 의심하게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어 북한 내 ‘강경파’인 최선희 외무성 부상은 24일 마이크 펜스 부통령의 사흘 전 <폭스 뉴스> 인터뷰 내용을 문제 삼으며 “우리는 미국에 대화를 구걸하지 않으며, 미국이 우리와 마주 앉지 않겠다면 구태여 붙잡지도 않을 것”이라고 쏘아붙였다. 이 무렵 북한의 최대 고민은 ‘미국을 믿을 수 있는가’란 신뢰의 문제였다. 김정은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과 4·27 도보다리 회담 등에서 “우린 핵을 포기할 성의를 갖고 있다. 미국이 우리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1년 이내에 비핵화하는 것도 가능하다. 미국이 받아들일지 걱정”이란 말을 쏟아낸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의 격렬한 반응에 당황한 트럼프는 그 직후인 24일 오전 9시45분(미국시각) 트위터에 올린 공개서한에서 “최근 담화문에서 드러난 엄청난 분노와 공개적인 적대감을 볼 때 회담을 여는 게 부적절하다고 느낀다”며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예정했던 회담을 전격 취소했다. 정의용 실장은 그날 늦은 아침(한국시각으론 한밤중이었을 것이다) 볼턴에게 ‘강력한 항의’의 뜻을 담은 전화를 걸어왔지만, 야치는 “회담이 취소돼 크게 안심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물론 이것이 최종 결말은 아니었다. 김계관은 회담 취소 직후인 25일 공개담화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시기 그 어느 대통령도 내리지 못한 용단을 내린 점을 높이 평가”했었다며 “조선반도와 인류의 평화·안정을 위해 열린 마음으로 미국 측에 시간과 기회를 줄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 역시 26일 문 대통령과 판문각에서 깜짝 정상회담을 열어 북-미 회담에 대한 간절한 의지를 드러냈다. 김 위원장은 문 대통령에게 감사의 뜻을 담은 포옹을 남겼다.
키를 쥔 트럼프 역시 진심으로 회담을 취소할 생각은 아니었다. 판문각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졌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인 26일 “우리는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만날 것이다. 이는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북한도 <노동신문> 1면을 통해 “6월12일로 예정된 조-미 수뇌회담”이란 표현으로 회담을 기정사실화했다. 정작 해결된 문제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파국은 일단 회피된 듯 보였다.
※6회에선 6·12 싱가포르 합의에 대한 일본의 반응과 아베의 대북 강경 접근에 이견을 제시했던 일본 내 ‘소수 의견’을 다룹니다.
길윤형 | 통일외교팀 기자.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초년 기자 시절부터 강제동원 피해 문제와 한-일 관계에 관심을 갖고 여러 기사를 써왔다. 2013년 가을부터 2017년 봄까지 <한겨레> 도쿄 특파원으로 근무하며 아베 정권이 추진해온 다양한 정책들을 가까이서 살펴봤다.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아베는 누구인가>, <26일 동안의 광복> 등을 썼고, <나는 날조 기자가 아니다>, <아베 삼대>를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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