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진 ㅣ 이화여대 초빙교수(과학교육)
날씨가 맑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는 뭘까? 환해지기 때문일까?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어서일까? 아니면 깨끗한 느낌이 들어서일까? 이유야 무엇이든 공통점이 있다. 햇빛 때문이다.
달의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지구의 모습은 바다와 대지와 구름이 어울려 다양한 색감을 자아낸다. 반면 달의 표면은 색이 단조롭고, 그늘진 곳과 해가 비치는 곳의 대조가 뚜렷해 마치 굳어 있는 화석 같다. 그래서 달에 착륙한 우주비행사는 살아 있는 지구에 대한 외경심과 그리움을 더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진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우주인이 딛고 선 달의 표면은 햇살에 반사되어 빛나는데, 떠오른 지구 주변의 하늘이 온통 캄캄하다.
지구에 대기가 없다면 달에서 본 것처럼 낮 시간에도 하늘은 밤처럼 어두워 별이 보일 것이다. 주변 물체에 반사되어 실내로 들어온 빛은 벽면에 선명한 자국을 남기며 날카롭고 차가운 느낌마저 들게 할 것이다. 동틀 때의 여명과 환해지는 기분도 갖기 어려울 것이다. 먼 산을 바라봐도 능선을 따라 은은하게 빛나는 정기도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모나리자의 미소를 도드라지게 하는 뒤편 계곡과 들판 사이의 희미한 빛깔을 다빈치가 그려내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멀리서 온 빛은 직선에 가깝다. 하지만 대기 중의 미세한 기체가 빛을 사방으로 산란시켜 주변을 밝게 한다. 하늘이 파란 것은 기체가 짧은 파장의 파란빛을 골라내 우리 시야로 보내주기 때문이다. 밤에도 달빛이 기체에 부딪혀 하늘은 여전히 파란빛을 내겠지만 워낙 강도가 약해 우리 눈에는 파란 하늘 대신 별이 빛나 보이는 것이 고마운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은하수와 별에 담긴 낭만도 느끼기 어려웠을 터이다. 대기 중에 부유하는 물방울이나 빙정은 프리즘 역할도 한다. 평범한 무지개가 어느 잡지의 기상사진전 우수작에 선정되어 이상하게 느꼈다. 알고 보니 카메라의 노출 시간을 늘려 달빛이 빗방울에 굴절·반사되어 만들어낸 무지개를 담은 것이다.
대기 중에는 먼지가 공존한다. 수증기는 먼지나 다른 기체와 결합하여 연무 입자가 되기도 하고, 응결하여 구름 방울이 되기도 한다. 먼지나 연무 입자도 빛을 굴절·반사시키지만 프리즘 기능이 약해 부연 색을 드러낸다. 다양한 색깔의 빛이 모이면 희게 보이는 이치다. 먼지 농도가 높아지면 하늘의 파란색이 희미해 보이고 뭔가 깔끔하지 않은 인상을 준다. 두꺼운 구름이 해를 가리면 투과하는 빛의 양이 적어 검게 보인다. 여름철 하늘이 부옇고 왠지 우중충하고 우울한 기분이 든다면 십중팔구 연무가 끼었거나 두꺼운 구름이 많은 때다.
가을이 되면서 점차 기온이 떨어지면 대기 중의 수증기량도 줄어든다. 이동성 고기압이 접근하며 북동풍이 태백산맥을 건너오면 동해의 청량한 공기가 우리나라를 차지한다. 습도가 낮고 먼지가 줄어든 만큼 높은 곳에서부터 기체가 햇살에 반짝이며 옥빛 하늘을 보여준다. 천고마비란 이런 때를 가리키는 것일 게다. 연중 이런 날이 며칠이나 될까마는 그때만큼은 먹지 않아도 마음마저 넉넉해진다.
저녁이 되면 지평선에 누운 햇살이 두꺼운 대기를 통과하는 동안 파란빛을 잃게 되어 대신 선홍빛이 시야에 들어온다. 아직 저물지 않은 연한 하늘색을 배경 삼아 얇게 드리운 양떼구름에 반사되어 나오는 형형색색의 저녁놀을 보고 있으면 하루의 피로가 풀리고 평화가 온다. 지나간 여름은 유난히 긴 장마로 찌푸린 날이 많았다. 남부와 중부를 오가며 폭우가 쏟아지더니 연이어 태풍마저 덮치며 편안할 날이 없었다. 마이삭이 지나간 자리에 가을을 부르는 찬 공기가 내려온 날 모처럼 푹 잠에 빠졌다. 아침 햇살이 암막 커튼 사이로 들어오자, 한가지 생각이 스쳤다. 햇빛이 고마운 건 대기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